본문 바로가기

공감

“법률을 공익과 어떻게 조합하는가가 지금 해결해야할 문제”_김형태 변호사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우리나라 변호사법 제1조 제1항이 선언하고 있는 변호사의 사명이다. 모든 변호사는 당연히 인권옹호와 사회정의 실현에 최선을 다할 임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모든 변호사가 ‘인권변호사’여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인권변호사’라는 별도의 명칭이 생겨나 양심수를 수행하고 공공적 소송을 수행하는 일부 변호사들을 가리켜왔다. 그만큼 지난 수십여년간 대한민국의 변호사로서 변호사법 제1조 1항의 자명한 원칙을 지키는 일이 결코 녹록치 않은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굴곡의 한국 현대사를 꼿꼿이 걸어온 많지 않은 변호사 중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임수경·문규현 방북사건, 사회보호법 폐지운동,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송두율 교수 사건에 이르기까지, 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의 굵직굵직한 인권 관련 사건과 최근 인혁당 재심사건 담당까지 빠짐없이 등장하는 한 사람, 바로 김형태 변호사(50)이다.

이름만 바쁜 사람이 아닌, 진짜 바쁜사람을 만나다

    늦은 오후 한겨레의 시민편집인 실에서 만난 그는 예상과 달리 매우 소탈한 모습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한 페이지 가득의 학력과 경력, 불가능을 가능으로, 유죄를 무죄로 만들어내는 화려한 승소 사건들을 배경으로 연상되는, 실패를 모르는 야심 찬 변호사의 이미지와는 처음부터 매우 달랐다. 공감 뉴스레터편집팀 다섯명이 우르르 시민편집인실로 들어서자 여느 인터뷰와 다른 뜻밖의 인터뷰어 구성에 당황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편안한 웃음으로 공감 인턴들을 맞아준 김형태 변호사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법무법인 덕수 구성원 변호사, MBC와 한겨레신문의 고문 변호사, 문화방송 방송진흥위 이사, 학교법인 서강대학교 감사, 천주교 인권위원장 등 이 외에도 수많은 활동을 겸하고 있을뿐더러 각종 언론매체에서도 그의 글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의 각종 활동내역은 그가 소위 ‘이름만 바쁜’사람이 아니라 ‘진짜 바쁜’ 사람임을 보여준다.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다.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맡아온 주요사건들을 보면 임수경 씨 방북사건, 송두율 교수사건, 인혁당 사건 등 시국사건이 대부분이다. 지금보다도 더욱 법률가가 귀했던 시절, 판검사와 고소득 변호사의 길을 뿌리치고 보다 어렵고 힘든 길을 선택하게 된 ‘힘’은 무엇일까.

    “(내가 원래)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다.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어머니 치마고리만 잡고 다녔었다. 아이들과도 별로 안 어울렸다. 그런데 2학년 때 반장이 애들을 자로 때리고, 화장실도 못 가게 했다. 그래서 “너 왜 그러느냐, 그러지 말라”고 하였었는데, 그 이후 2학기 때부터는 압도적인 표로 반장으로 당선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반장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 때부터 아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1학년이면 당시에는 이제 막 한글을 배우던 정말 어린 시절이다. 어떤 환경 속에서 성장했던 것일까. 책이나 글을 접했다면 어떤 것들을 주로 읽었는지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무지하게 봤다. 고등학교 때에는 백철 평론가의 <성난 눈짓으로 돌아보라>를 보고 이러한 시야가 있구나하고 놀라게 되었다. 또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 때까지 함석헌 씨의 <씨알의 소리>를 굉장히 열심히 보았다. 노자 강의에도 관심이 많았고, 금강경 등의 불교서적, 대학교 때는 강원영 목사의 <대화>를 열심히 보았다. 주로 신문을 많이 보았던 것 같다.”

“법조운동 자체의 변호사를 꿈꾸었다.”

    그 동안 김형태 변호사가 맡았던 수많은 시국사건들은 어떻게 그에게 연결되었을까? 청년변호사회를 조직한 후로 찾아갔다기보다는 밀려드는 사건을 떠맡게 되었다고 한다.

    “1988년 이석태, 조용환 변호사와 함께 젊은 변호사를 중심으로 청년변호사회(청변)를 만들었다. 이돈명이나 황인철 변호사와 같이 소위 인품 위주의 명망가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호사를 통해서 어떻게 변혁을 이룩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법조운동 자체의 변호사를 꿈꾸었다. 변호사 10여명이 일주일에 한 번씩 세미나를 하면서 공부했었다. 그러나 곧 정법회와 합치자는 제의가 있었다. 나는 이에 격렬하게 반대하였지만 결국 표결을 통해 합쳐졌고,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합치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얼마동안 민변으로 사람(의뢰인)들이 폭주하였다. 그러면서 사건을 맡게 되었다.”

“인혁당 재심판결은 우리 시대 전체가 풀어낸 것이다.”

    그가 맡았던 사건 중에 가장 오랜 시간을 끈 사건 중 하나이자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과 인혁당 사건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의 경우,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 인혁당 재심판결이 나기까지도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리는 동안에도 어려운 사건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해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 물었다.

    “맡은 사건인데 끝까지 가야하는 것 아닌가. 인혁당 재심의 경우는 98년에 문정현 신부님이 해보라고 하셨다. 그 때만 하더라도 양심수 가족들도 인혁당 사건과는 함께 하기를 꺼려했었다. (이들은 진짜 빨갱이라고 받아주지도 않았던 것이다.) 또한 공식기록도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비공식적으로 이 기록이 계룡대 창고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마침 내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인혁당 사건을 케이스 샘플로 하고 기록을 내 놓으라고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얻게 된 기록은 큰 수확이었다. 이에 인혁당 사건뿐만 아니라 민청학련 사건 기록도 함께 찾아내어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인혁당 재심 사건의 경우에는 시운이 따라서 내가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활동을 하다가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조사하고, 나중에는 변호사로서 재심판결에서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보다도 시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인혁당 재심판결은 우리 시대 전체가 풀어낸 것이다.”

    모두가 범인이라 생각하던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의 이도행 씨에 대해서는 어떻게 범인이 아니란 걸 확신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나름의 기준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이도행씨의 경우 1심을 하지 않았고, 언론보도만 보고 진짜 나쁜 놈이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사건을 맡게 되고 4~5번 이도행씨를 만나면서 약간 산만하고 순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이 7시에 첫 출근을 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었고, 부인의 시체 사진을 보니까 눈썹이 진하게 그려 있었다. 이에 나는 부인이 보통 9시가 넘어야 화장을 하는데, 눈썹이 그려져 있으니 범행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고 반가워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건 문신이에요’하는 것이다. 눈썹문신은 장모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임을 인지하고 나를 이용할 만도 한데, 이 사람은 끝까지 문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숟가락 개수의 증거도 이와 비슷하다. 자신에게 사건이 불리하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불리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주장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다. 물론 한 번 당해본 적도 있다. 의정부 비리 사건에서 변호사에게 돈을 받은 형사를 변호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끝까지 돈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첫 재판에 가보니 사실은 그렇지가 않더라. 그래서 바로 나는 사임계를 내버렸다. 의뢰인이 진범이 아니라는 확신이 섰는데, 실제로는 진범인 것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언제라도 사임계를 낼 것이다. 나는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그것을 토대로 해결하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변호사의 시각으로 사건을 봐야 한다.”

    사건해결에 대해 확신이 있다 한들 아무나 사건을 해결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유죄임이 거의 확실시되던 치과의사모녀 살인사건과 같은 경우 어떻게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었는지, 평소에 어디서부터 사건해결의 답을 찾는지 물었다.

    “형사사건의 경우에는 기록을 꼼꼼히 보면서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다 보면 거기에 답이 다 있다. 검사는 한 달에 수백 건의 사건을 맡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꼼꼼히 수사할 수 없다. 그에 비하여 변호사는 한 사건에만 주력하기 때문에 오히려 변호사가 유리한 사건이 더 많다. 즉, 자세히 사건 기록을 읽다보면 ‘흠’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능력 또한 필요하지만 타고 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집착, 혹은 공격적으로 기록을 보는 자세가 중요하다. 일부 후배들을 보면 판사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면이 많은데, 변호사의 시각으로 사건을 봐야 한다.

    이도행 사건의 경우 내가 파악한 논점은 20개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목욕탕에 물 뿌려보기, 모형 연소 형태 보기 등 실제로 꼼꼼히 따져 보았다. 검찰에서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연소 과정을 테스트했다고 하지만 이는 어떤 조건을 주느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 또한 끊어진 커튼을 연구하기 위해서 청계천 등의 시장을 뒤져 같은 제품을 찾아 실험해보았다. 변호사들이 성의가 없어서 문제이지 그렇지 않다면 잘 찾아낼 수 있다.”

“공존, 환경, 자연과의 상생의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그는 천주교 인권위원장인 동시에 천주교 주교회의 사형폐지위원회의 위원장이기도 하다. 언론에서 사형제 폐지에 대한 그의 글과 인터뷰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폐지를 주장해왔다. 두 현안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국보법이나 사형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러한 사고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사람들하고 같이 살 수 있을까? 이 공존의 문제를 접하게 된다. 이를 더 생각해보면 결국 제도의 문제이다. 국보법의 경우를 생각해본다면, 국보법은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되고 있다. 이는 역사의 필연적인 흐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노무현 정권이 초기에 이를 폐지하지 않은 것은 상당히 아쉽다. 국보법의 폐지는 노무현 정권의 정체성 형성에 큰 변수로 작용했을 텐데 말이다.
    문제는 사형제 쪽에 있다. 사형제 폐지는 국회의원들이 칼자루를 들고 있는데, 이들에게는 자기의 정치적 생존이 결국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과 관계없으면 이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벽을 느꼈다. 이들은 사형제 폐지가 자신들의 표에 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법사위에서 깔아뭉개버린다. 다시 생각해보면 우리사회는 산업화를 지나 민주화를 거쳐 한 차원 높은 문화국가로 가는 길에 있다. 그리고 사형제 폐지는 우리 사회가 이와 같은 문화국가로 진입하는 데, 그리고 우리 사회가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왜냐하면 공존, 환경, 자연과의 상생이라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사람 목숨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사형제 폐지 문제는 더욱 아쉽다.”

“역사적 판결의 공적행위 자체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최근의 긴급조치 위반판결 판사의 명단공개에 대해 일부 언론 및 법조인들은 마녀사냥이라는 논조로 비판하기도 한다. 사형제 폐지와 국보법 폐지 등의 주장에서 진보적 입장에 서 있는 동시에 판검사 경력 또한 갖고 있는 그에게 긴급조치 위반 판결을 한 판사 명단 공개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지 않을까라는 기대와 달리 오히려 ‘인격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므로 역사적 판결의 공적행위 자체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서울신문에 칼럼을 썼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선은 판결문을 공개한 건데 여기에 판사들의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이고, 언론들은 이름만을 골라서 공개한 것이다. 따라서 판결문 자체를 공개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신시절 하의 긴급조치 위반이라는 역사적 판결의 공적행위는 어쨌거나 비판받아야 한다. 사회적 역사적으로 시대를 판단하는 것은 필요하며, 이는 해당하는 사람의 인격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판결’이라는 공적인 행위를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비판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답했다. 2007년 2월 2일 서울신문에 올린 기고에서 그는 “형법교과서는 ‘책임’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책임은 개별적 행위에 대한 책임이지 인격책임 또는 행위자 책임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개인 윤리차원에서는 ‘누가 이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랴.’라는 식의 자기 성찰적 접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과거를 직시하고 이를 토대로 올바른 미래를 그리는 공적 차원에서 보자면 그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고 적고 있다.”

“과거보다 공익과 사익의 구분이 어려워”
“법률을 공익과 어떻게 조합하는가가 지금 해결해야할 문제”

    김형태 변호사가 소속해 있는 법무법인 덕수는 고(故)황인철 변호사, 이돈명, 김창국 변호사 등 인권변호사 1세대 시절부터 대표적인 인권법률 사무소로 자리매김해왔다. 아름다운 재단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역시 창립 이후 변호사들의 공익활동(Pro Bono) 활성화를 위해 꾸준히 고민해오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법무법인 덕수 또한 이에 대해서 딜레마에 빠져 있다. 덕수는 굉장히 오래되어서 공증인가도 제일 먼저 했었다. 70년대에는 황인철 변호사 등의 공익 활동이 많았고, 그렇게 80년대, 90년대에도 공익활동을 해 왔다. 그러나 2000년대인 현 시점에서는 공익과 사익을 구분하기가 어렵다. 돈암동, 사당동의 철거민 문제 등의 경우에는 예전과 같으면 국가의 재개발 사업의 이익이 엉뚱한 데로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공동선을 추구한다는 공익적인 명문이 있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철거민끼리 돌 던져 싸우고, 이주비를 더 받기 위해 시설물을 설치하는 등 이것도 공익의 문제인지 의문이 드는 경우가 많다. 노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노조의 비리 문제가 커지고 있다. 이처럼 공익의 경계가 헷갈리고 있다. 우리 사회의 경제가 고도의 자본주의로 들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공익의 설 자리가 없어져가고 있다. 국정원과 덕수는 공동 운명체라는 말도 있다.
    법률을 공익과 어떻게 조합하는가가 지금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규모 로펌들이 사건을 휩쓸고 있어 덕수는 고사 직전이다. 그래도 공익을 전담하는 로펌이 한 몇 개는 있어야 하지 않는가? 여러모로 고민이다. 결국 로펌은 돈이 되는 기업 관련 업무 방향으로 가는 추세이다.”

“같이 살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차례”

    2세대 인권변론의 주역 중 한명임이 분명한 그에게 공익변론의 내일에 대해서, 그리고 공익변호사 혹은 인권변호사를 꿈꾸는 이들에 대한 조언을 구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우리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그 모델을 고민해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완연한 고도자본주의 사회가 다 되었다. 우리 사회의 앞날을 고민해야하는 상황에서 북유럽식 사회자본주의(Social Capitalism)의 성공으로부터 대안을 열심히 공부하여 활동 방향을 모색해야 하지 않나 싶다. 우리 사회는 한미 FTA 문제 등 점점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가고 있다.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우리보다 약한 다른 나라에서 비난받을 행동을 할 수도 있고, 통일문제를 생각했을 때에는 이후의 북한이 바로 해당될 것이다. 지금 이대로의 상태가 좋은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앞으로의 활동계획에 대해서 물었다.

    “지금까지는 계획이라는 것이 없이 처해 있는 상황에서 그 때 그때 일을 처리해왔다. 이제는 50이 넘었다. 예전에는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을까 생각했지만 몸이 빠져나간다고 해서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 생각은 초월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치의 충돌이 제일 무섭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돈의 이해관계의 다툼이 무섭다. 그래서 이러한 충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같이 살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차례라고 생각한다. 즉,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지금은 <<공동선>>이라는 잡지를 함세웅, 김용택, 박완서 씨와 함께 만들고 있다. 이를 운영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예전에는 무조건 싸우는 것을 추구했다면 이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무리 지어가며 <공동선>이라는 잡지의 이름이 여운을 남기며 입가를 맴돌았다. 동시에 ‘최저선’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과거 70~80년대의 공익활동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라는 하나의 이상향, 일종의 ‘최고선’으로부터 강하고 분명한 ‘공동선’을 끌어낼 수 있었다면 오늘날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같은 방식으로 이를 찾기는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방향의 전환은 어떨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최소한의 권익보호,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최저선’으로부터의 보다 생명력 있는 <공동선>을 생각해보았다. 공감의 길과도 닿아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無羞惡之心 非人也

    ‘우르르’ 몰려든 공감인턴들의 인터뷰는 예정시간을 훌쩍 넘겨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그는 후배같은 인턴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인터뷰를 멈출 수가 없었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인터뷰 내내 어두운 시대와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어온 힘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폼 나는 답변은 어려운데”라며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내심 기대했던 486세대다운 거창한 정의론이나 역할론 대신 짧고 분명한 대답이었다.
    ‘無羞惡之心 非人也’ 잘못됨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됨이 아니라는 맹자의 말이다. 잘못됨을 바로잡고자 하는 의(義)로운 마음이 가장 인간적인 마음임을 말해준다. “폼나는 답변은 어려운데”라며 짓던 그의 쑥스러운 미소와 “아닌 것을 옳은 것으로” 바로 잡고자했을 뿐이라는 그의 솔직담백한 열정이 더없이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서는 이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공감지기

연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