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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단체활동담] 노숙인과 ‘공감’하기

 

가끔 “노숙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도 있대”란 이야기를 듣지만 사실 노숙하는 이들의 대다수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경우에 해당한다. 물론 거리에 있는 분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다보면 “난 이게 편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그 말은 곧 시간을 지나 되짚어보면 ‘그대가 줄 수 있는 도움이 내 문제를 해결하기엔 역부족이야’란 의미였음을 깨닫게 된다. 노숙생활을 하는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문제들, 그러나 공통적이게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의 복합체들을 떠안고 있다. 그러므로 ‘노숙인’이라 불리는 개인에게 복합된 이러한 문제의 꾸러미들을 해결하도록 돕지 않는 이상 그들의 ‘탈노숙’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재의 노숙인 지원체계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입체적 해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노숙생활은 장기화되고, 신규 노숙인은 늘어나고, 노숙인들의 정신, 신체적인 질병은 깊어간다. 2005년에만 서울에서 307명의 노숙인이 죽었다. 1999년도 사망자의 3배에 이르는 수다. 노숙인 지원체계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동안 노숙인들은 ‘사망’으로서 노숙을 탈피하고 있는 역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렇듯, 개인에게 짊어진 다양한 문제들의 결말로서 ‘노숙’이라는 바닥에 이르게 되었다면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것ς 하지만 ‘노숙’이라는 상황은 끝없는 하강을 요구한다. 그것은 질병의 심화, 무기력의 학습과 같은 노숙 자체가 유발하는 면과 외부의 조직된 힘에 의한 것으로 나눠볼 수 있다. 노숙 생활 자체가 유발하는 문제들은 앞서 언급했듯, 노숙인 지원체계를 잘 짜는 방식으로 해결하면 된다. 특히 노숙인의 2/3가 밀집해 있는 서울시의 경우, ‘거리노숙 근절’과 같은 근시안적이고도 도구적인(서울시 핵심정책 수행을 위한 사전정지 작업으로서의) 정책목표를 폐기하고, ‘탈 노숙, 지역사회 정착’과 같은 근본적인 목표로 전환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노숙인들을 더욱 더 옥죄는 외부의 조직된 힘은 무엇인가ς 우선, 범죄 집단에 의한 착취를 들 수 있다. 최근 보이스 피싱에 의한 금융사기가 극성하고 이로 인해 복잡한 금융 메커니즘에 무지한 노인들이 주로 피해를 보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가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이 범죄의 전달과정에서 노숙인 명의의, 이른 바 대포통장이 활용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받지 못한다. 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집단 범죄는 과거 인신매매, 장기매매로부터 시작하여 대포폰, 대포차, 대포통장, 바지사장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실태조사를 해 보면 노숙인의 1/4은 명의도용으로 인한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명의도용 범죄는 대부분이 대가성을 미끼로 하여 노숙인들의 협조에 의해 이뤄지고 있어 해결 방안을 찾기도 어렵다. 결국 노숙에서 벗어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누적하는 결과에 이르게 된다.

<사진1:서울시의 반인권적, 폭력 행정에 항의하는 집회가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되고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더 분노할 것은 ‘보호의 주체’가 ‘탄압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노숙인 복지사업이 2005년도부터 지방이양 되면서 보호사업의 주체는 지방자치단체가 되었다. 여타의 경우 역시 그러하듯 이럴 경우 서울시의 정책은 타 지자체의 모델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러나 서울시는 거리노숙인을 근절하는 것을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아 다양한 폭력적 행정을 일삼고 있다. 우선 ‘노숙인 순찰대’를 운용하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군 전역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거리노숙인을 상대하는 과정에서 언어, 신체적 폭력 사례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또한 서울시는 거리노숙인 지원기관 및 상담원들에게 ‘상담 목표제’라는 것을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목표라는 것은 기관 및 상담원 별로 거리노숙인을 쉼터로 입소시킬 인원을 할당한 것에 불과하다. 쉼터가 이미 포화상태임은 물론 쉼터 기능의 한계가 누차 지적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시는 쉼터의 개선은커녕 마치 물동량을 조절하듯 인위적으로 거리노숙인을 쉼터로 입소시키려고만 하는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노숙인 탄압에 있어 또 하나의 주체로 경찰 역시 존재한다. 거리 노숙인 중 부당행위를 당한 경험이 있는 이들 중 절반은 가해 당사자로 경찰과 공안(사법경찰관리)을 지목하고 있다. 이처럼 경찰에 의한 피해사례는 무수히 발견되고 있는데 언론을 통해 보도된 최근 사례만 보더라도 해를 거르는 법이 없다.
2005년 지하철 방화 용의자로 한 노숙인이 연행되었으나 국과수 조사 결과 무죄가 입증되었음에도 시설에 입소시켜 계속 감시한 사건, 2006년 대변을 못 가릴 정도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한 노숙인을 벌금 140만원이 미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구치소로 호송하다 사망하게 한 사건, 2007년 영아 사체 유기사건 용의자로 지속된 노숙 여성을 국과수를 통해 무죄임을 확인 받았음에도 14일 동안 계속 구금한 사건…

<사진2:지난 16일 서울역 광장에서는 광진구에서 사망한 노숙인을 위로하는 49재가 열렸다, 사진-월간 소셜워커 추주형기자>올 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지난 5월 29일, 동맥 파혈로 촌각을 다퉈 후송해야 할 노숙인을 즉각 후송하지 않고 현장 체증, 무전교신, 환자를 쌀 비닐이나 신문지 찾기 등 부적절한 행동으로 시간을 지체해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하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배경에는 노숙인에 대한 경찰의 왜곡된 인식이 존재한다. 올 해 남대문 화재 사건 때에도 화재와 무관한 노숙인에 대한 표적 수사가 도마에 오른 바 있듯, 경찰은 언제나 노숙인을 ‘예비범죄자’로 취급해왔다. 거리 노숙인들이 경찰을 대상으로 하는 요구 중 가장 빈번한 것은 제발 불심검문을 하지 말라는, 아니 하루에 한 번만 해 달라는 것이다. 한 노숙인은 “불심검문을 받았다는 증표를 이마에 붙여 달라”고 까지 한 바 있다. 경찰의 노숙인에 대한 편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주거의 박탈은 곧 안전의 사각지대, 치안 공백 상태를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노숙인은 누구보다도 치안 서비스를 우선적으로 필요로 한다. 물론 현재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 범죄피해자보호규칙, 범죄수사규칙’에서 사회취약계층에 대해 경찰이 세심한 배려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들이 활자에서 뛰쳐나와 경찰 행정으로 체화되는 법은 없다. 올 해 사망사건을 계기로 ‘공감’을 비롯한 인권사회단체들은 ‘경찰에 의한 노숙인 차별철폐 연대모임’을 구성하여 노숙인과 같은 사회취약계층에 대한 경찰 대책 촉구와 경찰의 인식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경찰은 개선은커녕 위 사망사건에 대해 사과한 번 한 적이 없다. 경찰은 ‘경찰이 새롭게 달라지겠습니다’라는 새 간판에 부끄럽지 않은 응답을 해야 할 것이다.

<사진3,4:2008년 주말배움터 봄학기 진행사진. 사진3은 컴퓨터 기초교실, 사진4는 왕기초영어교실>위에 언급한 문제 외에도 노숙 상태를 벗어나게 하기 위한, 노숙인들에게 빚어지는 차별과 폭력을 제거하기 위한, 나아가 노숙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열기 위한 과제는 무수하다. 그리고 이런 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들은 현재 노숙상태에 있는 이들은 물론 노숙과 무관해 보이는 시민들 공동의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노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평범한 원칙에 충실하자는 의미이자,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위험’이 일상화된 사회를 ‘다른’ 사회로 바꿔가는 길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노숙인’의 문제는 비단 현재 노숙 상태에 처한 이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 그들의 인생 이력 속에는 개인이 어쩔 수 없었던 사회의 조류가 있다. 우리 또한 그 조류에 ‘얼마만큼’은 휩쓸리고 있지 않은가ς 그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지 않은가ς 그러한 문제의식의 작은 실천으로서 우리는 노숙 대중, 비노숙 대중들과 함께 하는 ‘주말배움터’라는 교육, 문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교육+문화’라는 주제는 노숙인들의 평균학력이 중졸미만이라는 현실에서, 여가를 돈으로 사야만 하는 현실에서 채택한 것으로 비록 안정적인 공간 미비로 3년째 여러 단체의 틈새 공간을 떠돌며 이어오고 있으나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노숙 운동의 주제들을 공유하는 자리로 조금씩 자리를 잡고 있다. 물론 야학과 같은 형태로의 안정성 확보를 위한, 대상화를 극복하기 위한 노숙 대중들의 자치적인 공간이기 위한, 조금이라도 ‘대안스러운(ς)’ 꺼리들을 실천할 수 있기 위한 공간의 확보와 같은 과제들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노숙인들만의 운동이 아닌, ‘노숙’이라는 현상에서 출발하여 다른 세계를 열기 위한 여럿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중단 없이 실천될 것이다.

지난 대선 당시 영등포구의 한 후보가 지역민들의 이해관계를 자극하며 “노숙자를 정리하겠다”고 하였듯 노숙인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 내지 책임방기는 ‘시민 편의를 위해’, ‘민원 때문에’와 같은 시민들의 여론을 빙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시민과 노숙인의 대립구도의 조장으로는 노숙문제 해결은커녕 사회 전체의 인권수준마저 동반 하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물론 일부 노숙인들의 지나친 구걸행위와 싸움, 불특정한 이를 상대로 한 폭력이 불안한 면도 있다. 그러나 그런 행위에 대한 규제책은 국민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공정한 법의 집행에서 찾으면 될 일이다. 노숙인을 대상으로 한 어떤 방안을 만들자는 주장은 위험하다. 지금 시기 무엇보다 간절한 것은 담뇨도 빵도 그 무엇도 아닌 노숙인과 비 노숙인 사이의 ‘공감’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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