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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락한 삶이 좋다” – 오아시스프로젝트 김윤환

쉼표하나

88년, 어느덧 복학생이 되어 학교로 돌아오니 그전과는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었다. 학내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사실 난 그동안 쉬었던 그림을 많이 그리고 싶어서 학내의 번잡한 데모대열에 끼는 것을 주저했고 자리를 피했다. 조급한 마음에 스스로를 강하게 몰아쳤고 실기실에서 밤늦게까지 남아 그림을 그렸다. 군대에서의 몸서리 쳐지는 악몽들을 지우기위해서였기도 했고, 그동안 근질거렸던 붓질을 마음껏 휘두르고 싶은 욕망이 끓어 넘쳤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학교당국은 실기실에서 밤새는 것을 금했으나 회화과 학생들은 실기실로 들어가는 개구멍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벽까지 들락거리며 작업하기도 하고 주머니 속 꼬깃한 돈을 모아서 술과 간식을 사다 먹곤했다. 적어도 등록금문제가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돈 문제에 예민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진학을 꿈도 꾸지 못할 집안형편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대학에 들어갔고, 그것도 이번이 두 번째 학교였다. 1984년에 중앙대 조소과를 일년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다음해 입시준비를 다시 해서 다른학교 회화과 1986학번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는동안 홀어머니를 몹시 괴롭히게 되었다. 두 번씩이나 입학금을 마련하셨고 그러고도 모자라 드문드문 생활비를 대주셔야했다. 항상 마음의 짐이 되었기 때문에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월세와 생활비, 미술재료비를 장만하기 위해서는 서울의 미술학원에서 주중에 강사로 일하거나, 지방학원에서 주말강사로 하루종일 일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나는 줄곧 서울에서 대구로 주말강사를 다녔고, 일하는 시간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돈을 받는 편이었다. 그러나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구하거나 작업실을 구하기 위해서는 보증금이라는 목돈이 필요했지만 늘상 그달 그달을 살기 바빴다.

그런 나에게 대학의 기업식 운영방식으로의 전환은 참을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등록금은 매년 10% 정도씩 올랐고 해가 더해질수록 엄청 불어났다. 그러나 나의 한달 아르바이트 보수는 별 변화가 없었다. 1988년 가을은 등록금 싸움의 계절이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총장실은 점거되었고 많은 수의 학생들이 총장실로 출근하거나 “아예 본전 뽑자”며 숙소삼아 이용하기도 했다. 후배들의 밤샘 농성에 어떤식으로든 응원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물을 한 양동이 끓여 봉지커피를 타다 주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10명 가까이 되는 회화과 학생들과 공동 거주하고 있었다. 그곳은 거의 매일 10명 이상씩 어울려 놀다가 자곤 했던 회화과의 사설놀이터 같은 곳이었다. 숙소는 학교에서 불과 2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끓인 양동이를 옮기는 것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쉽지 않았다. 펄펄 끓인 물 한 양동이를 오른손에 들고 왼손에는 커피믹스를 담은 검정비닐봉지와 휴대용 가스렌지까지 들고나니 자연 움직임이 둔해졌다. 조심스레 이동했지만 총장실 건물을 지척에 두고 그만 발등을 뜨거운 물에 데고 말았다. 다행히 물은 좀 식어서 화상이 심하지는 않았다. 암튼 그날 그 모습으로 총장실을 방문했을 때 총장실에 무리지어 모여있던 학생들은 ‘저 사람이 뭐하는 사람인가’하고 어리둥절해 했다. 몇몇 아는 후배들이 있어서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하면서 커피 한 잔씩을 돌릴 수 있었다. 그 후로도 나는 본격적인 데모판에 뛰어드는 것을 주저했지만 후배들의 수고를 외면할 수 없어 드문드문 데모에 참여했었다. 등록금문제는 해가 바뀌어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어김없이 돈을 벌기위해 주말을 대구에서 보내야 했고, 나의 숙소는 몇 개월에 한번씩 옮겨 다녀야만 했다. 혼자 방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담해야 할 보증금만큼의 월세를 항상 더 내는 식으로 지냈다. 당시 실기실에 열심히 붙어있었더니 그림그리기에도 비교적 자신감을 갖기 시작 했다. 그때가 1989년 여름이었다.

어느 날 교정에 2절지 크기의 포스터가 붙었다. 포스터에 들어있는 사진을 본 순간 나는 경련을 일으킬 뻔 했다. 이철규의 주검 사진이었다. “이철규는 조선대 학생인데 교지편집장으로 수배받다가 광주 인근 저수지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내용은 신문을 통해 며칠 후에야 알게 되었다. 정말 충격적인 사진이었다. 부패하여 부풀어 오른 두 눈과 몸뚱이는 며칠동안 뇌리를 계속 맴돌았다. 결국 나는 이 사건을 그리기로 했다. 붓을 잡은 날로부터 일주일동안 밤낮으로 그렸다. 내 기억에 당시 대부분의 학교수업들이 종강하고 방학이 시작되려는 시점이었을 것 같다. 방마다 한두 명 있을 정도로 실기실에 남아있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내가 그린 두 장의 유화 중 한 장은 가로가 240센티미터에 세로가 120센티로 베니어합판 한 장을 판넬로 짠 크기였고, 다른 한 장은 120×120으로 베니어판의 반 크기였다. 나는 홀린 사람처럼 붓질을 해댔고 그러는동안 그림은 차츰 윤곽을 갖춰나갔다. 그림에서는 자신의 신념을 펼치다가 계략에 말려 결국 죽음까지 이르게 되는 순교자의 모습과 죽은 이철규의 모습이 서로 오브랩되어 그려졌다. 나는 그 그림을 완성해놓고는 몸서리쳤다. 나의 분노와 충격을 막상 그림으로 표현했지만 몹시 사실적으로 표현된 탓에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살이 떨렸고 무서워졌다. 작은 몇 장의 사진을 보고 가공해 낸 이미지들이 혼합되어 커다란 그림으로 재표현 되고나니 이젠 그 것을 그린 나자신이 그림을 대할 수 없게 돼버린 것이다. 나에게 기억된 수많은 파시즘에 대한 두려움이 음습했고, 창작과 재가공의 과정에서 생긴 수많은 새로운 이미지들이 줄곧 나를 괴롭혔다. 결국 실기실에 펼쳐져있던 그림은 나의 다른 그림들 뒤로 숨겨지고 말았다.

그 후 많은 것들이 달라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세상에 대해 관망하기만을 바라던 나는 적극적으로 의문점들을 찾아다니며 책을 뒤지고 여기저기 묻고 다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자기 동족마을의 학살에 충격과 슬픔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광주학살을 그린 오월의 많은 그림들은 자신들이 그곳에서 직접 겪은 참혹한 현실을 고발한 고백록이다. 나는 1989년 여름 이철규의 주검을 간접적으로 접했지만 그 충격을 그림으로써 내 인생을 결정지었다. 그전까지 내가 그렸던 인생은 안온한 삶이었다. 빈민의 자식으로 태어나 먹고살만한 어느정도의 돈이 마련된다면 더 바랄게 없는 그런…… 그러나 나는 이철규를 만난 이후 내가 바라던 삶을 살지 못했다. 1990년에는 학교에서 미대와 동아리연합회 등을 다니며 활동했고, 1991년에는 강경대의 죽음으로 몇 개월을 연세대와 경기대 홍익대를 뛰어다니며 활동했다.

1992년 학교를 중퇴하고 나서 2년간 미술운동그룹을 결성해 활동했고 1994년에는 시민미술단체를 창립했는데, 현재 그 단체는 “시민미술단체 늦바람”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7년에는 환경운동연합에서, 지긋지긋한 1900년대의 마지막을 이국땅에서 맞고자 떠났던 프랑스에서도 줄곧 안티 WTO 등 현실에 개입하는 미술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예술운동인 예술스쾃을 만나게 된 것이다. 파리로 가기 전 어느 소도시에 머무는 동안 나는 어렵사리 공동작업실을 구해서 작업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도 예술스쾃이었다. 그 후 파리에서 알터나시옹이라는 꽤 알려진 전투적인 스쾃에서 잠시나마 작업했다. 그리고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꿈꾸는 삶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나는 어렵게 살아왔으므로 안락하고 편안하게 조용한 곳에서 살기를 바란다. 예컨대 남해 어느 한적한 바닷가에 거주하면서 풍경화를 그려 값싸게 팔아 연명하면서 텃밭도 일구며 소일하는 그런 삶 말이다. 하지만 그 꿈이 언제 이뤄질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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