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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법원- 여영학 변호사

시민단체 활동가들 몇이 한 사람 집에 모여 밥을 같이 먹었다. 눈이 소복이 내려쌓이는 고즈넉한 저녁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토론이 벌어졌다.

노무현 정권이 지금처럼 한미 에프티에이 협상을 밀어붙이는 건 나라 팔아먹는 짓이고 국민들을 도탄으로 내모는 짓이다. 다음 토요일에 기자회견을 열어서 한미 에프티에이 반대, 평택 대추리 관련 구속자 석방 요구, 부시 미 행정부 규탄 등등의 내용으로 성명서를 내자.

대략 그렇게 결론을 짓고 그 뒤 계획대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 자리엔 외신기자까지 참석해 성명서가 적힌 유인물을 받아갔다. 얼마 후 경찰이 그 때 모인 시민단체 활동가들을 잡아가서는 덜컥 구속했다. 여럿이 모여 정부를 비방하고 한미우호관계를 해치는 내용의 시국토론을 한 게 ‘죄’였다.

가정집에 모여 ‘사회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집회’를 했으니 집시법 위반이 되고, 외국인이 있는 자리에서 ‘헌법기관인 대통령을 모욕하고 비방’했으니 국가모독죄가 된다는 거였다. 수사를 마친 검찰은 경찰 의견대로 기소를 했고, 법원도 그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위와 같은 가정이 정말 현실에 일어났고, 그런 뉴스가 나온다면, 사람들은 근래 마음 많이 상한 국민들을 달래려고 정부가 모처럼 참신하게 기획한 깜짝 개그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대통령이 끝내 갈 데까지 가보려고 저지른 미친 짓이라고 짐작하거나.

물론 요즘 세상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20년 전만 해도 진짜 그 비슷한 일이 심심찮게 벌어졌다.

1985년 어느 봄날 사회단체 사람들 여럿이 누군가의 집에 모여 대통령 방미 이야기를 화제에 올렸다. 얘기 끝에 며칠 뒤 기자회견도 하고 성명서도 발표하기로 했다. 성명서는 “모든 민주화 세력은 대통령의 미국방문을 반대한다, 미행정부는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라, 미행정부는 광주사태의 진상을 공개하고 공식 해명하라, 미행정부는 강압적 수입 개방요구 등 일체의 경제적 압력을 중단하라”는, 요즘으로 치자면 너무 뻔해서 동네 호프집 공짜 안주로도 나올 법한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때만 해도 인권, 민주주의, 정의 하는 따위의 낱말을 썩 달가워하지 않던 경찰과 검찰이 그런 사람들을 잡아다 수사하고 기소한 것 정도야 그 시절의 흔하디흔한 ‘공무집행’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때가 아무리 어두컴컴한 야만과 폭력의 시대라지만, 법원까지 억지 논리를 끌어다대며 유죄로 결론을 내린 건 지금 봐도 참 낯 뜨거운 일이다.

몇 사람이 방에 둘러앉아 시국을 논한 모임이었지만, “미문화원 농성을 정점으로 하는 5월 투쟁을 찬양하며 구로지역 동맹파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뿐 아니라 각 운동 세력이 연계하여 실력으로 현정부를 퇴진시킬 것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된 공동성명서를 채택하고 대정부 투쟁방법을 논의하였으므로 집회의 목적, 성격에 비추어 이 사건 집회는 현저히 사회적 불안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는 집회”였으니, 집시법 위반이 되는 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또 외국인이 있는 자리에서 헌법기관인 대통령을 모욕하고 비방했으니 마땅히 국가모독죄로도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와 뭇솔리니 냄새가 풀풀 나는 이 ‘국가모독죄’는 유신정권 때 만든 것인데, 한번은 비슷한 사건에서 고등법원이 엄격한 해석이 필요하다며 무죄를 선고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대법원은 고등법원 판결을 다시 뒤집었다. 바로 그 대법원 판결문을 읽다 보면, 나치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처형당한 대학생 오누이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붉은 법복을 입은 나치법정의 판사가 침을 튀기면서 일장 훈계를 하는 장면이었다.

“국가모독죄의 입법 목적과 취지를 보자. 오늘의 세계를 국제시대라고 한다. 이 국제시대를 사는 우리 국민이 자주독립국가의 민주국민으로서의 그 긍지와 자각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청된다는 것은 그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하물며 이 지구상에서 가장 호전적이라는 북한공산집단과 실로 형용할 수 없는 가열한 대치상태를 계속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때 이와 같은 요청은 한층 더 제고되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일부 국민이 우리 민족의 역사적 병폐라고 하는 사대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국내외에서 외국인이나 외국단체에 대하여 그의 조국일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이나 그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모욕, 비방하고 그에 관한 사실을 왜곡하거나 허위사실을 날조, 유포하는 행위를 자행하여 국가의 안전이나 이익을 위태롭게 하는 사례가 거듭 되풀이되고 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대법원 1983. 6. 14. 선고 83도515 판결 중에서).

6월 항쟁이 지나고‘현저히 사회 불안을 야기할 우려가 있는 집회’를 금지한 집시법은 개정되었고, 형법에 들어있던 국가모독죄는 폐지됐다. 과연 그것으로 충분한가? 그 판결을 선고한 것은 집시법과 형법이 아니라 그 때 그 판사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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