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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세대의 공로수당’이라는 해괴한 이름 _ 글_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

  퇴근길 우편함을 보니 구청에서 보내온 우편물이 하나 꽂혀 있다. “어르신 공로수당 신청하세요.” 서울 중구에서 올해부터 만65세 이상 기초생활·기초연금 수급자와 차상위계층을 대상으로 월 10만원씩 지역화폐(카드) 형식의 공로수당을 지급하니 신청을 서두르라는 내용이다. 그런데 왜 하필 어르신 공로수당일까. 안내문은 이렇게 답하고 있었다. “사회·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하시고 현재의 우리를 있게 한 과거세대들의 공로에 대한 보답.” 어려운 가계 형편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제도가 신설됐는데 기껍지만은 않다. 수당의 취지도, 이름도 뭔가 해괴하다. 선물을 건네는 손에 뺨 맞는 기분이라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안내문을 건네받은 엄마의 첫 반응도 그랬다. “돈을 준다카이 좋기는 한데, 과거세대가 뭔 말이고? 내는 아직 살아있는데 과거세대라고 부르니까 기분이 쪼매 이상타.” 엄마의 이야기는 몇 해 전 어느 날에 대한 기억으로 나를 데려갔다.

 

과거밖에 없는 자

 

  그해 첫 안식년을 맞이한 나는 엄마의 생애사를 인터뷰해 자서전을 써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물론 자서전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곧 일흔을 맞이할 엄마 생신 때 드리면 값진 선물이 되겠거니 했다. 반나절 가까이 같이 울고 웃으며 엄마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몰랐던 엄마의 시간들을 가까이 마주하는 벅참에 한껏 들떠 있던 때였다. “근데 니는 와 지난 이야기만 물어보노? 앞으로는 안 궁금하나?”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나 역시 노년의 삶을 이미 매듭지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구나. 엄마에게도 내일의 소망이 있다는 걸, 엄마의 오늘을 만든 과거만큼이나 엄마의 오늘도, 엄마의 오늘이 만들어갈 미래 역시 소중하다는 걸 망각하고 있었구나. 그날 이후, ‘노후’(老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날마다 나이 들고 날마다 늙어간다는 말이 깊이 와 닿기 시작했다.

 

  ‘현재의 우리로부터 노년의 존재를 도려내어 과거세대로 추방하는 건 중구청만이 아니다. ‘현재의 우리를 거친 풍랑을 이겨내며 세상을 항해하는 존재로, 노년의 존재를 항구에 정박된 폐기 직전의 선박마냥 취급하는 일은 이 사회에서 너무나 흔하다.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희생의 역사로서만 그들의 지나온 시간은 존중받는다. 사회가 허락한 최소치의 필요를 넘어 오늘과 미래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면 이내 추악하다는 지청구가 뒤따른다. “가만히 좀 계셔.” 죽음의 확실성이란 생의 조건에서 노년에겐 자식이나 사회에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은 채, 그저 별 탈 없이 조용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만이 마지막 과업인 양 주어져 있다. 그래서 노년의 오늘과 미래는 사회적 비용의 다른 말이다. 존재하되 현재하지 않는, ‘우리로부터 추방된, 그리하여 그저 짐짝으로만 취급받는 삶에 존엄이 깃들 자리는 없다.

 

  현존하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미래세대로 호명하는 일이 사회적 배제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현존하는 노년의 존재를 과거세대로 호명하는 일 또한 배제의 다른 이름이다. 어린이·청소년에게는 미래밖에 없기에 오늘 비()시민의 자리가 당연시된다(“애들이 공부나 해야지 투표는 무슨 투표?”). 노년에게는 과거밖에 없기에 시민의 자리를 끊임없이 위협당한다(“집에나 계시지.” “몇 살 이상은 투표권을 박탈해야해.”). 그러하기에 현재의 우리라 상정되는 이들에게는 부양의 의무만이 강조된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유기성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란 존재를 특정한 시간 속에 가두는 것은 존엄을 쪼그려들게 만든다.

 

공로는 칭송인가, 기만인가

 

  공로수당이란 이름은 또 어떤가. 근거 조례(서울특별시 중구 어르신 공로수당 지원 조례)를 찾아보니 1조의 목적 조항에서 후손의 양육과 국가 및 사회·경제 발전에 기여한 세대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존엄한 삶의 질 향상을 위한수당을 제공한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존엄한 삶의 질은 마땅히 보장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여에 대한 보상으로 위치하고 있다. 서양호 중구청장은 이 제도를 보편적 복지의 확대라 말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취지는 정확히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전형적인 기브 앤 테이크’(give-and-take)의 논리다. 인권은 받았으니 돌려준다는 상호호혜성이 아니라, 자격이나 대가를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존엄한 삶의 동등성을 보장하겠다는 평등의 언어다. 앞선 서울과 성남의 청년수당 사례에서 제기된 복지 포퓰리즘 논란을 피해가기 위해 중구청이 공로에 대한 보답이란 명분을 끌어왔는지 몰라도, 이는 무임승차 논리를 앞세워 보편 복지나 피해자 지원 정책의 확대를 반대하는 논리에 오히려 편승한다. 누군가의 존엄이 보상의 차원으로 접근되는 순간, 누군가의 존엄은 자격시비에 휘말려 폐기될 운명에 처한다.

 

서울시 중구청 홈페이지의 ‘어르신공로수당’소개 배너 (출처 : 서울시 중구청 홈페이지)

  게다가 공로수당이라는 말은 칭송이라기보다 기만에 가깝다. 천재지변이나 개인적 실패, 탕진과 같은 불운이 설령 겹쳤을지언정, 지금 노년들이 경험하는 다층적 빈곤 문제는 사회적 부정의와 국가의 무책임이 켜켜이 쌓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매순간 최선을 다하기를 요구받았고 성실근면을 가훈 삼아 지내왔던 수십 년의 시간을 보내고서도 폐지 하나 더 줍기 위해 이웃과 실랑이를 벌여야 하는 삶을 당연시여기는 이 사회야말로 해괴하다. 노년, 특히 가난한 노년을 위한 복지의 확대는 공로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 앞서 착취한 것들에 대한 반납또는 사회적 부정의를 시정하기 위한 뒤늦은 조치에 좀더 가깝다.

 

  지역 차원의 다양한 복지제도가 확대되는 것은 분명 반길 일이다. 약간의 소득만 잡혀도 쥐꼬리만한 수급비나 기초연금을 깎아대느라 바쁜 이 나라에서, 표를 얻기 위해서든 신념에 기반한 것이든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소득으로 잡히지 않는 다양한 생활보장 정책들을 도입하고자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근본적 문제는 이 모든 제도의 총합도 존엄한 삶의 질이라는 목표치에는 한참이나 모자라다는 점이다. 그 사회적 폭력 아래 과거세대로 이름 붙여진 노년들이 오늘을 살아간다. 존엄을 위한 기본 소득이라는 굳건한 토대가 아닌, 선거나 중앙정부의 방침에 따라 흔들릴 모래성 위에 세워진 제도에 기대어 위태롭게.

 

_배경내 (인권교육센터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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