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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변의 변] 반(反)인권적 손해배상청구, 이대로 허용할 것인가? – 김수영 변호사

 

 

노동자들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은 헌법적 권리다. 헌법 제33조는 노동자들에게 노조를 만들어 단체로 교섭에 나서고, 교섭이 잘 안 풀리면 파업과 쟁의행위를 통해 풀어가라고 명하고 있다. 자신의 근로조건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사용자와 교섭을 해야 하는 불평등한 위치에서, 그나마 단체행동이라도 할 수 있어야 교섭력을 갖출 수 있다는 지극히 평범한 논리다.


여기 동양시멘트라는 회사가 있다. 석회석 광산을 추가 개발하기 위해 ‘프로젝트 파이낸싱’이라는 금융기법을 도입한다.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후, 새롭게 창출된 이 회사의 신용을 자신들이 일부 책임지겠다는 것이다. 은행은 새로운 회사의 신용 위에 동양시멘트의 신용까지 평가한 후 광산 개발 비용 1,190억 원을 대출해준다.


막대한 은행대출을 받은 페이퍼컴퍼니는, 그러나 노동력이 없는 인격이다. 광산을 개발하는 것은 실존하는 노동자들의 실제 노동이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페이퍼컴퍼니와 근로계약을 맺는다. 바로 그 순간,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은 한꺼번에 사라진다.


하청은 “당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힘이 없다”고 말한다(이는 사실이다). 근로관계를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원청은, 자신이 만든 페이퍼컴퍼니와 체결한 형식적 도급계약 뒤에 숨어 “그대들의 어려움은 나와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다”라 말한다. 헌법에 따라 근로조건을 개선하고자 단결하고 교섭에 나서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상황. 노동조합은 원청의 책임 있는 교섭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바꿔 말해 원청의 사업장에서 쟁의행위를 해야 한다. 이러한 쟁의행위는 원청과 근로자 사이에 직접적인 근로계약관계가 인정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모두 불법행위가 된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쟁의행위가 불법이라는 이유로 회사는 노동조합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한다. 나아가 손해를 미리 보전한다는 명목으로 조합원 개인의 재산에 대해 가압류를 신청한다. 물론 파업을 하는 경우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을 수 없다(노동조합법 제44조 제1항). 임금을 포기하고 쟁의행위에 나섰는데 이제 기존 재산마저 가압류당하고 막대한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한다니, 이러려고 파업을 했나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다. 노조활동은 급격히 위축되고 탈퇴자가 늘어난다. 손해배상청구와 가압류는 쟁의행위를 봉쇄하고 노동조합을 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다시 동양시멘트로 돌아가 보자. 사용자는 노동조합(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동양시멘트지부) 조합원들을 업무방해 등으로 형사 고소하였고, 하청 회사 명의로 쟁의행위에 대해 방해금지가처분을 신청하였다. 이 신청서에는, 원청 직원들의 출입이나 생산을 방해할 때마다 노동조합은 1천만 원, 조합원 개인은 2백만 원씩 지급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서 하청회사는 노동조합의 쟁의행위로 물경 50억 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하였고 여지없이 가압류 신청도 함께하였다.


민·형사와 원·하청을 오가며 그물망처럼 잘 짜인 사용자의 소송행위로 노동조합 활동은 파괴되었다. 84명의 조합원들이 함께 시작한 노동조합이었지만, 이제 모두 떠나고 23명밖에 남지 않았다. 사용자는 노조를 탈퇴하는 조합원들만 골라 가압류를 해제해주고 손해배상소송도 일일이 취하해주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있어야 돈을 받을 가능성이 높을 텐데, 노조만 탈퇴하면 된다는 것이다. 사실 노동자 80여 명에게 50억을 물어내라는 것부터 애초 실현 가능하지 않은 청구다. 사용자 측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은 명목처럼 손해를 배상받으려는 목적에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 그 자체를 위축시키기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앞세우고 노조에 끝까지 남겠다는 노동자들만을 소송의 대상으로 삼아 괴롭히는 것이다. 노조를 지키겠다는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기본권 행사를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로 탄압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소송은 헌법질서에 맞는가. 법원이 원고의 소제기를 법 원칙상 허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각하하는 경우들이 있다. 대법원은 “재판청구권의 행사도 상대방의 보호 및 사법 기능의 확보를 위하여 신의성실의 원칙에 의해 규제된다. 법률상 이유 없는 청구로 받아들일 수 없음이 명백한데도 계속 소송을 제기함으로써 상대방을 괴롭히는 결과가 되는 경우 이는 소권을 남용하는 것에 해당되어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1 한편 회사가 노동조합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에 대하여 하급심 법원은 “소제기가 소권남용에 해당하기 위하여는 원고에게 권리행사의 실질적 이득이 전혀 없으면서도 오로지 그 상대방을 괴롭힐 목적으로 제기된 것이거나, 그 밖에 공서양속에 반한다고 볼 정도로 중대한 사정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2


‘법률상 이유 없다’는 것은 원고의 소제기가 법적으로 아무 근거 없는 경우를 말한다. 원고 회사가, “불법행위가 있고 손해가 있고, 그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상 법률상 이유 있는 청구가 된다. 각하대상이 아니며 노동조합은 그 소송이 끝날 때까지 시달린다는 의미다. 또한, 위 하급심 판결에서도 회사는 오직 정리해고무효확인을 구하고 있는 노동자들만을 대상으로 민사 손해배상청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법원은 “그러한 사정만으로 소권남용에 해당하지는 않는다”고 간단히 판결하였다. 우리 법원은 회사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이 노동자들의 헌법적 권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시민들의 헌법상 기본권 행사를 막고 응징하려는 목적의 민사소송3을 미국에서는 이른바 ‘전략적 봉쇄소송’이라 한다. 이를 조기에 각하시켜 소송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여러 법리가 개발되고 입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4 한국의 법체계에서도 단체행동권 행사는 민·형사상 소추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 노조법이 정한 절차를 위반한 경우라 하더라도 헌법의 해석을 통하여 단체행동권 행사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 한 손해배상청구는 허용될 수 없다는 법해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5


우리 사회는 회사의 손해배상청구소송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들을 여럿 만들어왔다. 헌법상 권리를 행사하였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에게 감당할 수 없는 손해배상 책임을 지우는 것은 그 자체로 반(反)인권적이며,6 애꿎은 죽음을 강요하는 야만적 행위다. 언제까지 이러한 손해배상청구를 허용할 것인가. 막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회는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 것인가.


2014년 9월, 국회에서 쟁의행위와 민·형사 책임에 대한 토론회가 있었다. 발제자로 참석한 브레멘 대학의 교수는 독일에서 노동쟁의에 대해 민·형사 책임을 묻는 행위는 극히 꺼려지고 있다며 그 이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7



무엇이 법원과 사용자들을 자제하게 하는 원인인지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한가? 형법 규정의 적용은 명백히 근로자들의 이해에 반한다. 그러나 또한 이는 사용자의 이익에도 반한다. 

만약 근로자대표위원 또는 일반 근로자가 “폭력배의 두목”과 같이 1개월 또는 2개월 동안 교도소로 보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노동자들 사이에는 커다란 연대감이 형성되고 사용자 및 법원에 대한 비난이 신문과 텔레비전에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 노사관계의 전형적인 사회적 동반자 관계를 교란시키게 된다. 이것은 계급적 양심의 부활에 대한 기여가 아닌가? 그것은 더 두려운 일이 아닐까?

독일의 현행법에서도 불법파업은 처벌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여론과 사회의 일반적인 태도 때문이다.


노동조합은 회사경영에 없었다면 좋았을 상대가 아니다. 노동조합의 존재는 현대 기업 경영의 상수이며 사회적 협력의 파트너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사용자들의 인식 변화다. 또한, 후진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해 엄중한 사회적 비난이 필요하다. 법과 제도를 고치기에 앞서, 현행 법률의 합헌적 적용을 위해 법원이 태도를 바꿔야 하며 이를 위해 “여론과 사회의 일반적인 태도”가 변화해야 한다.

 

                                                                                                                      글_김수영 변호사


 

 

  1. 1. 대법원 1997. 12. 23. 선고 96재다226판결. 
  2. 2. 서울중앙지방법원 2004. 5. 19. 선고 2001가합3715 판결.
  3. 3. 정영수, “전략적 소송에 관한 연구”, 민사소송 제15권 제2호, 499쪽.
  4. 4. 정영수, “전략적 소송에 관한 연구”, 민사소송 제15권 제2호, 499쪽.
  5. 5. 김종서, “쟁의행위를 이유로 한 손해배상청구 비판”, 민주법학 제60호, 220쪽.
  6. 6. 김선수, “노동기본권을 무력화하는 손해배상·가압류 및 업무방해죄”, 손배가압류 개선방향 토론회 자료집, 3쪽.
  7. 7. Wolfgang Däubler, “쟁의행위와 책임, 독일의 상황”, 한국노동법학회·서울시립대 법학연구소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19~20쪽에서 발췌, 일부 의역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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