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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변의 변] 달걀로 바위치기? 밧줄로 배 당기기!




 


 


활동의 경험은 적지만 공감에서 ‘빈곤과 복지’ 영역의 일을 한다 하면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들여다볼 때마다, 현실에서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회의가 생길 때가 있다. 생활의 다양한 영역을 포괄하는 사회권의 목록들을 한국 사회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도대체, 어디서, 무엇부터 하는 것이 최선일지, 이 일들이 과연 권리 실현의 장애를 없애는데 도움이 되기는 할 수 있을지 하는 의문들이 잊을 만하면 떠오른다.


 


가령 주거권 문제를 보자. 부동산은 재테크의 수단으로 치부된 지 오래이고, 도시근로자 평균임금으로 서울의 30평대 아파트를 사려면 37년이 걸린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로 주택가격은 비현실적이다. 행정이 앞장서서 부동산 개발광풍을 몰고 가며, 건설자본은 그 속에서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 한편으로 쪽방 ․ 비닐하우스촌 ․ 고시원과 같이 최저주거기준에 못 미치는 주거가 엄존한다. 이런 현실에서, 지금 개발구역 세입자들의 주거이전비 소송을 대리하고, 주거권 현황에 대한 NGO보고서를 쓰는 일 ‘따위’가 ‘적절한 주거에서 생활할 권리’를 향상시키는데 과연 한 뼘이라도 소용이 될까, 달걀로 바위치기 아닌가, 하는 의구심들을 떨치기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이런 질문들과 회의를 잠시나마 날려버리는 설명을 만났으니, 혹시 나같이 자주 길 헤매는 사람들이 있다면 함께 나누고 싶다.  


 


조효제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겸 NGO 대학원)는 최근 샌드라 프레드먼(Sandra Fredman)이 지은 『인권의 대전환(Human Rights Transformed)』의 역서를 내면서 앞부분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실질적 강제력’을 가지는 ‘규정(rules)’과 ‘자명한 구속력’을 가지는 ‘원칙(principles)’을 구별하는 저자의 이론을 설명한 후(인권은 때로 ‘규정’을 발생시키지만 ‘원칙’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규정’은 준수하거나 위배하거나 하는 이분법으로 그 규범력을 설명할 수 있지만, ‘원칙’의 규범력은 법적 ․ 현실적 가능성을 감안하되 원칙의 내용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요구할 수 있는 일관된 힘에서 나오며 이는 ‘최적화를 향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이 구별을 분명히 하면서 원칙의 자명한 구속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든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옮겨본다. 


 


“……그러나 ‘원칙’이 유동적 성격을 지니긴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자명한 구속력’이라는 일관된 방향성을 띤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규정’은 못질하는 것과 비슷하다. 못질은 못을 박거나 빼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원칙’은 못질과 다르다. 큰 호수에 보트를 띄워 호수를 건너간다고 상상해보자. 그런데 이 호수에는 통나무들이 아주 많이 떠 있어서 보트가 통나무를 헤치고 호수 이편으로 건너오기가 참으로 어렵다. 따라서 이 상태에서 노를 젓는 것만으로는 보트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보트에 밧줄을 매어 호수 이쪽 편에서 계속 당겨준다고 치자. 줄을 당겨도 통나무들 때문에 보트를 끌어오기가 쉽지 않지만 그래도 밧줄을 계속 당기면 보트가 조금씩 이쪽으로 올 수 있다. 이 비유에서 보트가 이쪽 편으로 건너와야 한다는 규범은 ‘원칙’이라 할 수 있다. 보트에 밧줄을 매어 이쪽으로 오게 하는 힘은 ‘자명한 구속력’이다. 호수 위에 떠 있는 장애물인 통나무들은 자명한 구속력을 방해하는 ‘다른 원칙’들이다. …… 따라서 사회권의 경우, 보트가 당장 이쪽 편에 도착했느냐 하는 것으로 그것의 준수 여부를 가리지 않고, 보트에 밧줄을 매어 계속해서 쉬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이쪽으로 당기고 있느냐 하는 것으로 준수 여부를 판단하게 된다. 어떤 특정 시점에서 보트의 위치를 보자면 보트가 통나무들 사이에 끼어 움직이기가 어렵다 하더라도 통나무들과의 간격, 보트의 각도, 바람의 방향, 노 젓는 사람의 노력 등을 합쳐서 그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형성해야 한다. 이것을 ‘최적화를 위한 요구’라고 할 수 있다.(『인권의 대전환』 33-34쪽, 옮긴이 해설 중에서 옮김)”


 


이처럼 역자는 사회권과 같은 특정한 인권의 규범력을 설명하기 위해 ‘통나무가 가득 찬 호수, 그 위에 떠 있는 보트를 밧줄을 매어 저편에서 이편으로 끌어오기’라는 비유를 들었다. 하지만 보트에 밧줄을 매어 끌어오는 힘에 빗댈 것이 ‘자명한 구속력’ 뿐이랴. 나는 이 비유를 빈곤철폐운동, 주거권이나 환경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 나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악전고투하는 인권활동가들을 위해서 빌려 쓰고 싶다. 우리가 하는 일을 바위 깨뜨리기가 아니라 호수 이편으로 보트 끌어오기라고 생각하자. 우리 손에 쥔 것은 달걀이 아니라 튼튼한 밧줄이라고 상상하자. 밧줄이 보트에 제대로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우리가 보트를 끄는 곳의 자리를 똑바로 잡아 둔 것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쉬지 않고 밧줄을 당기고 있다면, 보트는 이쪽으로 건너온다. 어느 한 순간 보트를 에워싼 통나무들에 가로막혀 보트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가 밧줄을 계속 잡아당기는 한 보트는 이쪽으로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나 스스로에게도 건네는 말임은 물론이다. 


글_ 차혜령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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