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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변의 변]권리를 가질 권리가 없는 이들- 황필규 변호사

     ‘사회적 약자’나 ‘취약 집단’은 원래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상황이 열악하면 할수록 더 많은 차별과 권리침해를 받기 마련이고, 더 심각한 경우 인권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마저도 충분한 관심을 못 받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적 없이 살아가는 이들, 즉 무국적자들이다.


 


     무국적자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는 다소 생소하다. 그렇지만 이미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르는 무국적자들이 정식 체류자격 없이 한국에 살고 있다. 위장결혼임이 밝혀져 한국 국적을 상실했는데에도 본래 국적국에서 국적을 회복시켜주지 않는 경우, 화교출신 탈북자인 경우, 중국 체류 사실만 확인되고 탈북사실을 입증할 수 없는 경우, 외국인 여성이 혼인 외 자녀를 둔 경우 등 법률상 무국적자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은 매우 다양하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무국적자들은 그동안 끊임없이 양산돼 왔다. 당시 나는 관련 법안 공청회에서 만난 무국적자들에게 사무실로 찾아올 것을 권유했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이 처한 어려움은 현행법으로도 문제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 일부 있었지만, 법제상 근본적인 변화나 관행상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권리 보호는 요원해 보였다.


 


     문제는 이들이 단지 체류자격이 없는 상황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되돌아갈 나라가 없다. 더 나아가 국민으로서, 그리고 심지어는 외국인(법적으로는 외국인의 개념에 무국적자도 포함된다)으로서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권리로부터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이 가입 및 비준해 국내법적 효력을 갖고 있는 ‘무국적자의 지위에 관한 협약’에는 체류자격의 유무와 관계없이 무국적자에게는 차별금지, 종교의 자유, 물권, 지적재산권, 재판청구권, 배급권, 교육권 등이 보장되어야 하고 신원증명서가 발급되어야 한다. 또한 체류허가절차를 거쳐 합법적 체제가 가능해진 경우, 결사의 자유와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근로권․노동권을 가질 수도 있다. 또한 여행증명서 등이 발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이런 권리를 보장할 법적 의무를 위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심한 차별과 인권침해로 이들을 대하고 있다.


 


 


무국적자를 대하는 정부의 이중성


 


     미등록 이주민의 경우, 한국인과 혼인하면 특별한 어려움 없이 혼인신고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국적자의 혼인신고는 받아주지 않는다. 여러 구청을 돌아다녀봤지만 대답은 한결같이 “무국적자이기 때문에 준비 서류들을 들고 오지 않으면 접수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책임기관인 법무부의 답변은 더욱 가관이다. “무국적자의 혼인신고를 받아주는 구청도 있다고 들었으니 적당한 곳을 잘 찾아봐라.”


 


     위장결혼으로 국적을 박탈당한 이들 중 일부는 외국인구금시설에 갇혀 있다가 일시적으로 구금이 해제되면서 1,000만원에 이르는 보증금을 납부했다. 그런데 만약 이들이 본래의 국적을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면, 구금이나 일시적 구금해제 조치는 시행할 이유가 없다. 돌아갈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에서 어떤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이들에게 1,000만원이라는 돈이 얼마나 소중한 돈인지는 자명하다. 또한 법무부는 이들의 국적회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국 정부는 언제까지 거금을 담보삼아 3개월마다 일시적 해제를 연장하는 무기한 종신구금을 유지하려고 하는가? 그나마 운이 좋아 단속을 피한 이들은 어떤 신분도 갖지 못한 채 불안에 떨며 살고 있다. 



     반면 법무부는 ‘국익’에 도움이 되는 이들에게 이중국적을 허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가 얽힌 ‘국적’ 문제를 개념과 실체가 모호한 ‘국익’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자의적으로 제도화하려는 것이다. 법무부는 사람의 가치가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전반적으로 인권과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가운데, 무국적자에 대해 관심을 갖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역으로 한국의 인권과 민주주의 수준은 바로 물 곳도 돌아갈 곳도 없는 무국적자들이 처한 상황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사람으로서 살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돼버린 이들은 사실상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소한 이들에게 체류자격을 부여하고, 한국국적을 취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정도의 조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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