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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변의변] 법관의 독립을 이끄는 중력 – 정정훈 변호사

 


1.    사과 한 알이 나무에서 떨어진다. 일반적인 감각이라면 이것을 보고 ‘사과가 빨갛게 익는 가을’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면, 그 빨간 사과를 잡아끄는 중력과의 관계를 놓쳐서는 안된다. 사과의 운동에 방향과 속도를 부여하는 것이 중력이기 때문이다.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 개입 의혹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감각은 ‘법관의 독립’ 훼손이라는 프레임에 일방적으로 치우쳐 있다. 법관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이유는 ‘국민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사법권의 독립’이 현실과의 마찰이 없는 무중력의 공간에 놓인 절대적 진리값은 아니다. 사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법관의 독립에 힘과 방향을 부여하는 중력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이 사건의 핵심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법관의 독립을 이끄는 중력으로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관점을 회복해야 한다. 적어도 두 관점 사이에 무게중심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


 


 


2.    조금만 돌아가 보자. 소송을 대리하다보면, 당사자로부터 대법원에서는 판결 선고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가라는 질문을 받게 된다. 나의 대답은 “할머니도 모른다”는 것.


 


   대법원이 3년 5개월간 판결을 선고하지 않은 재판지연의 위법성이 문제된 사건이 있었다. 2002년 2월 대법원에 접수된 해고무효확인사건이 2005년 7월에야 판결이 선고됐다. 사건 당사자는 1년 5개월이 지난 시점부터 수차례 신속한 재판을 촉구하는 각계의 탄원을 재판부에 전달했고, 50여일이 넘는 기간 동안 대법원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며 재판지연의 부당함을 항변하기도 했다. 여러 언론에서 사건을 보도했고, 2004년 국정감사에서는 이 사건 재판지연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묵묵부답, “재판중인 사안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 게 원칙”이라는 대법원 관계자의 공허한 대답만이 돌아왔다. 결국 이 사건의 주심 대법관이 퇴임하고, 5개월이 지나서 판결이 선고됐다.


  


   이 사건에서 재판부가 당사자나 시민사회의 정당한 목소리를 외면한 채, 무표정의 오만으로 자신만의 템포에 따라 선고기일을 정할 수 있었던 명분은 ‘법관의 독립’이었다. 그러나 사법권의 독립, 법관의 독립은 재판의 공정성을 위협하는 부당한 개입에 대한 결연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지, 재판부의 부당한 절차 진행을 지적하는 정당한 목소리를 외면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만약 이 사건에서 대법원장이 주심 대법관에게 재판절차 지연의 문제를 지적했다면, 그러한 행위는 법관 독립의 침해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일까?


 


 


3.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개입 의혹과 관련해 언론에 보도된 이용훈 대법원장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촛불사건이라서 그렇지, 만약 판사가 일반 민사사건을 1년 넘게 재판하지 않고 갖고 있다면 법원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맞느냐. 사법행정에 도움이 되느냐, 재판에 대한 압력이냐, 이것은 진상조사단이 조사해서 정치하게 판단해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다. 나도 잘 판단하기 어렵더라.” (2009. 3. 6. 한겨레)


 


   위의 재판지연 사건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면서, 당사자는 물론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법원의 독단적 권위가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부당한 재판 개입과 사법행정을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라는 의견에, 아주 조심스럽게 동의한다. 그러나 이 미묘한 문제를 판단할 기준은 분명히 있다. 법관의 독립을 보장한 근본 이유인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관점으로 ‘법관의 독립’을 스크린하는 것이다.


 


   민사사건을 1년 넘게 재판하지 않는 것은 당사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1차적으로는 이러한 문제들이 규정과 시스템에 의해서 해결돼야 하지만, 그러한 체계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법원장은 지적과 조언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 경우, 재판 개입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에 따라 여러 변수들을 정교하게 따져야 하는, 그야말로 미묘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된 촛불사건의 경우는 이러한 미묘한 문제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형사사건에서 다른 재판부의 위헌법률제청신청이 있는 경우, 헌법재판소의 결정 이후로 재판을 연기하는 것은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조치다. 민사사건의 재판 지연과는 비교의 방향을 완전히 달리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가 공개변론을 예고하는 등 법률의 위헌 여부가 비중 있게 다투어지는 경우라면, 설령 법관 개인이 합헌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기다려 신중하게 판결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 법정 구속기간이 정해져 있는 구속사건은 보석의 필요성 등을 고려한 구체적 판단이 필요하겠지만, 불구속 사건에 있어서는 헌재 결정 이전에 절차를 속행해야 할 어떠한 공적인 필요성도 발견하기 어렵다. 이러한 경우, 법관의 양심에 따른 개인적 판단보다는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헌법적 요청이 더욱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을 진행하지 않는 것이 위법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법률의 해석이라기보다는 권력의 의중에 가깝다고 본다.


 


   앞에서 인용한 이용훈 대법원장의 발언은 ‘법관의 독립’을 구체적인 상황과 관계 속에서 떼어내 무중력의 공간에 고립시킴으로써 방향을 잃고 미끄러지게 했다. 제도로서의 ‘법관의 독립’에 내용과 방향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중력과의 관계에서 점검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4.    이번 사건을 통해 수렁에 빠진 것은 법원만이 아니다. 사건을 이념적 프레임으로 구겨 넣으며, 빨간 칠을 해댄 일부 언론과 여당도 같이 깊은 수렁에 빠졌다. 우물에 빠지면 우물만큼의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법이지만, 법원 내부의 일을 ‘비겁하게’ 외부에 공개했다는 그들의 비난을 접하면서는 아찔한 충격을 받는다.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상식도 공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득한 거리감에 당혹스럽다.


 


   다시 한 가지만 분명히 하자. 이번 사건은 결코 사법부 내부의 문제가 아니다. ‘국민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됐고, 침해될 우려가 있었다’는 중대한 문제이다. 법원 내부에서 속닥거리며 미봉할 문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사법부는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자기폐쇄성을 극복하는 계기로 삼는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의 거울에만 비춰보는 폐쇄적인 ‘사법 에고이즘’이나 ‘사법 나르시시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재판의 당사자를 시각의 중심에 놓는 관점이 중요할 것이다. 전관예우로 대표되던 사법 불신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임계점을 넘은 만큼, 법원의 뼈를 드러내는 자기 변화가 요구된다.


 


 


5.    이번 사건을 통해서 국민들은 사법의 권력화가 사법행정과 권위적 관료주의를 매개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베버식으로 표현하자면, 법원의 관료화라는 쇠창살로 된 새장(iron cage)에 ‘법관의 독립’과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갇힌 격이다. 문제가 된 대법관의 퇴진만으로 끝내는 것은 사법행정권력과 법관권력 사이의 또 하나의 타협이고, 낮은 차원의 미봉이 될 수 있다. 새장 속에서 법관의 양심만 구출해서는 안된다.


 


   대다수 법관들의 선의와 양심을 신뢰하지만, 그 신뢰를 배반하는 시스템이 문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서양 격언에 주의한다면, 선의를 왜곡하는 시스템의 퇴진이 절실히 요청된다. 그것이 법관의 독립을 이끄는 중력인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의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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