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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포커스] 여권별곡 – 박영아 변호사


 

 



10살 지훈(가명)은 축구를 좋아하고 게임을 좋아하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지훈이는 재작년까지만 해도 엄마, 그리고 아빠와 셋이서 넉넉하진 않지만 평범한 가정을 이루며 살았다. 그러나 2015년 1월 말, 아침에 출근한 아버지가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지훈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엄마와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찾아간 곳은 시내로부터 멀리 떨어진 교도소처럼 생긴 시설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엄마까지 집을 나가선 돌아오지 않았다. 지훈이는 지금 보육원에서 지내고 있다. 그 바람에 학교도 전학을 가고 친구들과도 헤어져야만 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지훈이의 아버지는 B국 사람이었다. 15년 전 한국에 왔다. 지훈이 엄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여 지훈이를 낳았다. 그리고 2010년에는 귀화허가를 받아 한국 사람이 되었다. 당시 이중국적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B 국 국적을 포기했다. 그런데 지훈이 아버지가 한국에 입국할 때 사용한 여권에 생년월일이 실제 나이보다 6년 정도 앞당겨져 있었다. B국은 2007년까지만 해도 출생등록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국민의 대다수가 출생등록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나이와 공적 신분증명서류상의 나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지훈이 아버지의 출생이 처음 등록된 것은 2005년 결혼할 때였다. 한국에서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출생등록증명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때 신고된 생년월일은 여권상의 생년월일이었다.
 
한 가족의 가장이 되고 한국인이 된 지훈이 아버지는 자신의 원래 나이를 되찾고 싶어했다. 그래서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문의했다.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출생등록증명서를 가져오면 정정을 해줄 수 있다고 했다. 본국에 있는 가족에게 출생등록이 원래 나이로 정정된 출생등록증명서를 발급해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불행의 시작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생년월일이 정정된 출생등록증명서를 제출받은 출입국관리사무소는 지훈이 아버지가 2001년 처음 입국할 당시 사용한 여권이 실제 출생일이 아닌 허위의 출생일이 기재된 “위명여권”이었고, 귀화허가신청도 허위의 출생일로 한 것이므로 하자가 있다고 본 것이다. 귀화허가는 결국 2011년에 취소되었다. 이미 B국 국적을 포기한 지훈이 아버지는 무국적자가 되었다. B국 대사관을 찾아갔지만 인제 와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말만 들었다.
 
국적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가정은 있었다. 심지어 그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었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계속 다니며 지훈이를 학원과 도장에 보냈다. 아빠는 국적이 없어지는 큰일을 겪었지만, 지훈이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을 했다. 그러다 2015년 초 아버지가 직장에서 단속이 된 것이다. 무국적이기 때문에 당연히 체류자격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강제퇴거명령을 받고 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되었다. 외국인보호소 구금은 강제퇴거의 집행을 보장하려는 조치이다. 그러나 지훈이 아버지는 국적이 없으므로 보낼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B국 대사관은 무국적자는 국적을 회복할 수 있는 절차도 없다고 했다. 출입국관리 당국은 지훈이 아버지를 1년 넘게 붙잡아두다가 올해 초 비로소 보호일시해제(보석과 비슷한 제도임)로 풀어주었다. 구금된 기간 동안 지훈이 아버지는 마음은 물론 건강도 많이 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사소한 문제였다. 가장이 없어진 가정은 풍비박산이 났다. 지훈이 어머니는 생활고로 집을 나가고, 지훈이는 졸지에 고아가 되어 보육원에 보내졌다. 아버지는 어렵게 보호일시해제를 받아 나오긴 했지만, 취업이 허용되지 않고 변변한 방 한 칸을 마련하지 못해 지금도 지훈이를 데리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보육원에서 허락하는 외출과 전화통화로 아들을 보고픈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공감은 지훈이 아버지의 강제퇴거명령을 다투는 소송이 항소심에 계류 중일 때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소송에서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지훈이 아버지 여권의 효력 유무였다. 위조나 변조된 여권이었다면 무효임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훈이 아버지의 여권은 B국 정부가 유효하게 발급한 여권이었다. 생년월일만 지훈이 아버지가 자신의 생년월일로 알고 있는 날짜와 다를 뿐이었다. 물론 지훈이 아버지가 실제 생년월일로 알고 있는 날짜도 정말로 실제 생년월일인지 알 수 없다. 출생등록은 물론, 병원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출입국관리 당국의 입장은 출입국관리법에서 여권을 “대한민국정부·외국정부 또는 권한 있는 국제기구에서 발급한 여권 또는 난민여행증명서나 그 밖에 여권을 갈음하는 증명서로서 대한민국정부가 유효하다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므로 여권이 유효한지 아닌지의 판단은 출입국당국, 즉 강제퇴거명령을 하는 출입국관리사무소장의 재량이 인정되고, 허위 내용이 기재된 여권은 유효한 여권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울고등법원도 “유효한 여권”이란 ‘여권소지자의 실제 인적사항과 그 여권에 기재된 내용이 동일하여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을 요건으로 하는데 원고의 여권은 허위의 내용이 기재된 “위명여권”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이 판결은 대법원의 심리불속행결정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위의 논리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우선 “대한민국”과 “출입국관리사무소장”을 동일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즉, 출입국당국은 특정 여권에 대해 “대한민국이 유효한 여권으로 인정하는 여권인지”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지위에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판단에 재량이 개입할 여지가 있다고 볼 수 없다.
 
다음은, 신분의 동일성을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당연히 공적인 기록이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도 실제 생년월일이 가족관계등록부상 생년월일과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부모가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 생년월일을 신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 지인 중에 12월생인 아들이 나중에 학교에서 치일까 봐 집에서 태어났다는 허위의 진술서를 제출하고 병원의 출생증명서를 숨긴 채 다음 해 1월생으로 신고한 사람이 있다. 당시 일종의 노하우로 회자되었던 수법이기도 했다. 이러한 아이들의 출생등록과 여권도 다 무효로 간주하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실제 생년월일로 정정하기 위해 가정법원의 허가가 필요하다. 물론, 출생등록 등의 공적 기록은 될 수 있으면 실제 생년월일을 반영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출생등록을 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 실제 생년월일을 입증할 수 있는 경우 정정을 허용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실제 생년월일을 반영하고 있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동일성을 증명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다. 지훈이 아버지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출생등록이 없었기 때문에 여권이 최초의 공적 신분증명서류였던 것뿐이다.


 


 




 


 


“위명”이나 “위명여권”은 사실 법적인 용어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명확한 정의도 없다. 한국에서 강제퇴거명령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재입국 제한 등을 피하고자 다른 명의나 다른 생년월일로 여권을 재발급받아서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재입국하는 사람들을 제재하기 위해 생겨난 용어로 보인다. 그러나 여권의 효력까지 부인해야만 제재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있다. 불법적 목적 없이 합법적 절차를 거쳐 본국의 인적사항을 바꾼 경우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다. 무엇보다 2001년 처음 한국에 입국한 후 한국땅을 떠난 적이 없는 지훈이 아버지는 위와 같은 상황에 해당하지도 않는다. 지훈이 아버지의 경우 한국과 B국의 공적인 기록은 언제나 일치했으며, B국에서 출생등록을 정정한 후 곧바로 한국정부에 생년월일 정정을 신청했다.
 
지훈이 아버지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문 중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허위의 인적사항이 기재된 여권을 사용하여 우리나라에 입국한 자는 그 신원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고 할 것이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국익이나 공공의 안전, 경제 또는 사회질서를 해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하는 행동을 할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거나 그에 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훈이 아버지의 신원이 불확실해진 것은 한국 국적이 취소되어 무국적자가 되면서부터였다.
 
지훈이 아버지가 2010년 생년월일 정정신청만 하지 않았다면 한국인인 가장으로서 단란한 가족을 지켜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국익이나 공공의 안전, 경제 또는 사회질서를 해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하는 행동을 염려가 있다고 인정할만한 상당한 이유”란 과연 무엇인가가 궁금할 따름이다. 가정에서 잘 키우고 있던 아이의 양육을 국가에 전가하는 결과만 낳은 출입국관리행정이 달성한 공익이 과연 무엇일까.



 
글_ 박영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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