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감

[공감통신] 촛불: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한상희 교수

 

 

“헤겔은 모든 거대한 세계사적 사건과 인물들은 두 번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다음에는 희극으로”

잘 알려진 마르크스의 경구이다. 유럽제국에서 구체제가 소멸한 것은 첫 번째의 비극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독일은 여전히 모순적인 구체제를 받아들이며 “자기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믿는다고 그저 상상하고 있으며 세계가 이 착각을 공유하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현실을 비판한 말이다.


최근 스멀스멀 우리의 이목을 끌어당기며 다가오는 개헌론은 불과 두 달 만에 이런 역사적 냉소주의를 재현한다. 그 비극은 박근혜 대통령의 2017년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비롯되었다. 터져 나오는 최순실 스캔들을 미봉하기 위해 급거 마련된 이 개헌의 속삭임은 연이은 촛불의 함성에 의해 탄핵이라는 최악의 비극상황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극단적인 정쟁과 대결 구도가 일상이 되어” 버린 우리의 정치 현실을 혁파하여 우리나라를 “선진국 대열에 바로 서게 할 틀을 마련하는 것”을 모색해 보자고 했지만, 결국에는 시대착오이자 명백한 모순이며 형편없는 구체제처럼 대통령의 실체를 상실한 채 청와대 관저의 한 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너무도 무모하였기에 촛불에 불태워질 수밖에 없었던 이 제안은 지금 이 순간 똑같은 구도로 재연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철폐하고 분권형의 통치체제를 마련함으로써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자고 주장한다. 물론 그 취지나 내용은 크게 다툴 일은 아니다. 목표가 뚜렷하다면 그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은 여러 가지의 분석 틀을 갖다 대면서 머리를 맞대기만 해도 최선의 것이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하면 머리만 숨기는 꿩처럼 국정농단의 비리가 속속 드러나고 있음에도 이 뜬금없는 개헌론으로 정치권과 여론을 분열시키고 자신의 안위를 도모할 수 있는 도피처를 확보하고자 하였던 대통령의 제안과 마찬가지로, 이 개헌론 또한 여전히 자기 자신을 믿는다고 그저 상상하고 있는, 그리고 이 세계가 그 착각을 공유하기를 요구하는 저 프로이센의 허위의식만큼이나 우스꽝스럽다. 


얼마 전에 있었던 시민의회 사태는 그 좋은 전범이 된다. 정치 스타트업 와글이 시민정치참여를 이끌기 위한 시민의회 대표단의 구성을 제안하자 수많은 네티즌들이 ‘누가, 어떤 자격으로 시민을 대표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이를 무위로 돌려 버렸다. 광장에서 촛불을 들며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를 펼쳤고 또 그렇게 하고 있는 시민들은 자신의 의사를 왜곡하거나 그 위에 군림하는 그 어떠한 권력 내지는 대표자도 허용하지 않았다. 촛불의 시민들은 스스로 오똑한 정치주체가 되어 세상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저 개헌론 역시 동일한 항의에 봉착한다. ‘누가, 어떤 자격으로 이 헌법을 개정하려는가?’ 우리가 만든 촛불집회는 박근혜 한 사람의 퇴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국정농단을 방치하거나 혹은 방조하였던 정치적·사회적 적폐들을 해소하고 이에 편승하여 무한 탐욕에 빠져 있는 재벌들의 전횡 체제를 개혁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짧게는 87년 헌법 체제의 한계를 딛고 그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민주적인 체제를 만들며 길게는 48년 제헌헌법이 추구하였던 “우리와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하는 균등한 사회를 실현하기를 지향한다. 그러기에 그것은 가히 12월 혁명 혹은 촛불 혁명이라는 이름에 충분히 값할 수 있다.


하지만 개헌론은 이 모든 것을 우리들로부터 앗아간다. 마치 87년의 6월 민주항쟁에서 스스로 정치·사회개혁의 주체로 나섰던 수많은 시민들로부터 개헌의 주도권을 빼앗아 8인회니 뭐니 하면서 자신들만을 위한 헌법을 급조해 내었듯이, 그래서 그 결과 시민들이 스스로를 정치의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가로막아 버렸던 상황이 여기서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저 개헌론의 한 축에 소위 개방형 이원정부제라는 것이 있다. 정치인들 사이에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는 보도도 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시민들은 거의 모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체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언제 어떻게 달라지는지에 대해서는 그 주창자조차도 제대로 밝히지 않고 있다. 대통령의 임기가 5년 단임에서 4년 중임으로 바뀐다고 해서 청와대 정문 앞의 마당이 민주광장이 될지 아니면 지금처럼 “박근혜 퇴진”이나 “7시간”이 적힌 팻말을 든 시민은 근접도 하지 못하는 금단의 성역으로 남아 있을지 누가 아는가? 독일식의 건설적 내각책임제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근데, 그게 비정규직과 실업을 오가는 수많은 을들의 인생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는가? 정치인들은 물론 이런 제도의 여하에 따라 자신의 권력과 입지와 명예가 오고간다. 하지만, 장군의 가슴에 훈장이 늘어갈수록 한 맺힌 병사의 한숨도 따라 늘어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출처 : 국민일보_윤성호 기자)


사실 촛불의 분노를 생각한다면, 광장을 떨치는 그 함성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할 일은 이런저런 개헌이 아니라 현 체제가 가지는 시스템의 개혁이며, 이를 위해 어떤 법과 어떤 정책, 어떤 관행을 어떻게 바뀌어야 할 것인지를 따져 보는 일이다. 선거법을 바꾸어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고 선거연령-이는 정당가입연령이기도 하다-을 낮추며, 정당법을 개정해 지역정당의 설립을 가능케 함으로써 지역정치를 활성화한다든지 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보다 유효하게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개헌 이전의 급선무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납세자주권의 개념을 도입하여, 정부의 예산배정이나 재정지출에 대해 감사를 청구하거나 그 변경을 요구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자방과 같은 사업을 중지할 것을 법원에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그 자체 우리 일상생활의 질을 바꿀 수 있게 한다. 상가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하는 것은 젠트리피케이션과 같은 생활공간의 파괴를 막음으로써 억장 무너지는 꼴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첩경이다. 약탈적 재벌의 전횡을 억제하고 노동3권이 실효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하며, 직장의 안정성과 급여의 적정성이 보장된, 품위 있는 노동을 보장하는 법개정작업에 착수하는 것은 우리 삶의 질을 급진적으로 개선할 수 있게 한다. 


그 외에도 할 일은 무수하다. 촛불로 타오르는 우리의 요구는 개헌이 아니라 혹은 개헌보다 먼저 우리 삶의 문제에 집중된다. 그들의 정치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 그들의 탐욕을 위한 경제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위한 경제, 그들이 만드는 법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법, 그것이 바로 촛불민심의 요체이다. 그들의 정의가 아니라 그 위에 우뚝 선 우리의 정의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개헌논의는 그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 모든 요구들이 집적된 결과로써 응결될 때에 비로소 의미 있는 정치행위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개헌론은 또다시 반복되는 희극의 역사가 된다. 그것이 기대하는 촛불의 연착륙은 불가능에 대한 꿈이자 상상 속의 자기기만이다. 개헌론이 블랙홀이 되어 촛불집회의 열정을 빨아들이고 그 빈 공간을 기성 정치인들의 권력이 대체하는 형태의 시나리오는 어떻게 하든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다. 우리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제3차 담화에 숨어있는 허위와 의도까지도 제대로 포착하고 232만 명의 집회로써 그를 탄핵심판에까지 이끌었다. 블랙홀과 같은 흡인력은 개헌론이 아니라 그런 시민들이 들고 있는 촛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촛불은 개헌론 같은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는 결코 꺼지지 않는다. 우리가 촛불이고 우리가 바로 헌법이기 때문이다. 지젝이 말하듯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은 바로 우리다.”


글_한상희(공감 이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공감지기

연관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