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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통신] 수고했어 오늘도 – 김덕진(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2016년 12월 9일-박근혜 탄핵 가결의 날, 국회의사당 앞 집회현장 ⓒ노순탁

 

2012년 4월 당시 야당은 19대 총선에서 참패를 했다. 여당의 대승을 지켜보는 마음은 참담했다. 이명박 정권의 폭정에 지쳐 있었던 우리들에게는 같은 해, 12월에 열리는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을 교체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총선의 충격에서 정신을 막 차릴 때쯤 저 유명한 거리의 신부 문정현 신부님께서 5.18 기념재단이 수여하는 광주인권상을 수상하시게 되었다. 문정현 신부님은 상을 받는 것 자체를 그리 반가워하시지는 않았지만, 상금이 무려 5천만 원이라는 소식을 들으시고, ‘거액의 투쟁기금’이 생기는 일이니 상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셨다. 문정현 신부님은 시상식이 열리는 5월 18일 인권재단 사람 박래군 소장, 송경동 시인, 문화연대 신유아 활동가 그리고 나를 광주로 부르셨다. 신부님을 뵙고 축하 인사를 건네자마자 담배나 한 대 피우자고 우리를 구석으로 모으시더니 나지막하게 말씀하셨다. 당신이 받으시는 상금을 모두 내어놓을 테니 반년 남짓 남은 대선 때까지 그 돈을 종잣돈으로 하여 이명박 정권의 연장을 막을 싸움을 계획 해보라 하셨다.

문정현 신부님의 제안에서 시작된 것이 바로 쌍용(S) 강정(K) 용산(Y)의 연대 SKY_ACT 스카이공동행동이었다. 우리는 다른 것은 몰라도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만은 어떻게든 막아보자는 생각으로 제주 강정마을을 출발하여 서울 시청광장으로 입성하는 <2012생명평화대행진 SKY_ACT>를 준비했다. 정리해고와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 해군기지 건설로 삶의 터전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 제주강정마을 주민들, 공권력에 의해 희생되고 쫓겨난 용산참사 유족들과 철거민들이 모여 한 달 동안 전국 30여 개 도시, 40여 개의 투쟁현장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만나 손을 잡고 얼싸 안으며 함께 싸울 것을 결의했다. 가는 곳마다 눈물 나지 않는 현장이 없었고 공권력의 폭력에 상처받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이명박 정권 4년간 민주주의와 인권은 무너졌고 쫓겨나고 내몰리는 이들은 마음 둘 곳을 잃은 상태였다. 우리는 전국을 돌며 권력과 자본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달려가는 대한민국의 민낯을 똑똑히 목격했다.

 

2012생명평화대행진 (출처:뉴시스)

 

10월 말, 수도권으로 입성한 대행진단은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을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의 일주일 동안, 매일 행진단원이 두 배씩 늘어나는 기적을 경험했다. 우리는 그 기세로 대행진의 마지막 날 서울광장을 가득 메웠고 바로 그날부터 대한문 앞에 커다란 천막 하나를 치고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희생자들의 분향소와 더불어 ‘함께 살자 농성촌’을 세웠다. 대행진 중에 초고압 송전탑과 핵발전소에 맞서 싸우는 밀양 주민들을 만났고 이들이 농성촌에 합류하여 ‘SKYM 함께살자 농성촌’을 이뤘다. 대행진의 마지막 날이 농성의 첫날이 되는 순간이었다.
 
유독 차가웠던 그 겨울 우리는 추위와 싸우며 어떻게 하면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비선실세’ 나 ‘우주의 기운’이 일으킨 구체적인 사건들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면 국민들이 매우 불행해질 것이라고 예상하는 일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음 놓고 지지하며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야당의 유력한 후보가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매일을 보냈다.

 

혹독하게 추웠던 2012년 12월의 겨울밤 농성촌 천막에서 박근혜의 18대 대통령 당선 확정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농성촌 식구들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는지 모른다. 참담한 심정을 아무리 털어놔도 위로가 되지 않는 밤이었다. 박근혜의 임기가 끝나는 날만을 기다리며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우리의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도 박근혜 시대의 개막은 많은 이들에게 절망감을 주었다. 해고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파업투쟁 중이던 노동자들의 비보가 계속 날아들었다. 우리는 대한문 농성장에서 사흘이 멀다하고 추모제를 열며 분노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박근혜 시대의 시작은 재벌들의 시대, 가진 자들만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억압받고 차별받던 이들에게는 앞으로 5년을 더 견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해 겨울 그들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의 예상처럼 지난 4년간 박근혜는 실정을 거듭했고 박근혜를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해야 하는 수많은 이유들을 확보했다. 국정원 대선 개입으로 부정선거의 수혜자가 된 박근혜를, 우리는 그 정권이 시작할 때부터 끌어내려야 한다고 외쳤다.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들을 외면한 박근혜는 외면했고 대법원에서도 실체가 없다고 판결한 RO를 들먹이며 내란음모 사건을 만들어 국회의원을 6명이나 보유한 정당을 해산시켰다.

 

난데없이 혼이 정상이어야 한다며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고 선언했고 한반도 평화의 상징인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국민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를 일본과 체결했고 미군의 사드배치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공공부분에서부터 성과퇴출제를 도입하겠다며 노동개악을 밀어붙였고 경찰의 물대포로 백남기 어르신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우리는 그때마다 이 무도한 정권은 이제 끝을 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퇴진’이라는 구체적 요구에 선뜻 동의하는 국민은 별로 없었다. “박근혜는 물러나라”는 구호는 그저 언제나 정부에 반대하는 운동권들의 구호처럼 공허하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벌들을 압박해서 받아 낸 800억 원이라는 돈으로 재단을 만든 대통령의 최측근 비선 실세라는 사람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녀의 부정입학을 비롯한 최순실의 사람들이 살아왔던 오만방자한 실태가 그대로 밝혀지면서 국민의 분노가 극에 차올랐다. 그리고 한 종편 뉴스를 통해 비선실세의 테블릿PC 내용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단 일주일 만에 국민의 95%가 “박근혜 퇴진”을 외치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 그런 상황이 잘 믿어지지 않았다. 국민들의 절규에는 귀를 닫고, 피해자들의 몸부림 앞에서는 눈을 감던, 저 참담한 청와대의 주인을 끌어내릴 수 있다니, 박근혜의 대통령 임기를 단축시키고 감옥에 보낼 수 있다니, ‘정말 이렇게 우리가 이길 수도 있는 걸까’ 하는 희망도 갖게 되었다.

 

2016년 12월 24일 제9차 촛불집회에서의 소등 퍼포먼스를 무대에서 바라본 장면 ⓒ김덕진

 

10월 말 처음 2만 명이 청계과장에 모였다. 일주일 후에는 20만 명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그다음 주에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100만 명이 모였고, 그다음에는 전국에서 200만이 넘게 모여 한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을 들었다. 그냥 모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시민들 스스로 선택한 비폭력 집회는 그 어떤 때보다 강렬하고 무서운 힘을 발휘했고 성별과 세대,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어 평등하고 자유로운 광장의 문화를 만들어 냈다. 아무 힘없는 이 개인들이 광장에서 보여준 이 위대한 힘이 그들의 일상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래야 이 촛불과 광장의 의미가 완성될 것이다.
 
나는 매일매일 커져 나가는 감동의 시공간을 가장 가까이서 빠짐없이 느끼며 온 사람 중에 하나다. 그렇게 바라던 박근혜가 대통령이 아닌 나라에 거의 다 다다른 것 같은데, 그런데도 마음 한켠은 여전히 무겁다. 박근혜 하나만 끌어내려서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권의 적폐’라고 불리는 수많은 실정을 바로 잡아야 비로소 진정한 승리가 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회를 통한 개혁입법과제들도 해결해야 하고 곧 다가올 대통령선거에서 제대로 된 정권교체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5년 전 그 대선 때처럼 지금도 당선 가능성이 있는 대권 주자들 중 마음 편히 지지할 사람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2012년 박근혜 당선을 막자고 함께 전국을 누비고 천막 안에서 그 혹한을 같이 견디던 사람들이 보고 싶어진다.
 
우리는 지금 이 소중한 기회를 부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를 더욱 성장시킬 이 소중한 기회, 그리고 각자의 일상에서 마주할 진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중한 기회, 이 두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싸움은 없다. 큰 싸움을 위해 소홀해도 되는 작은 싸움도 없다. 우리는 지금 승리를 저 앞에 두고 있다. 아직 승리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다시 숨고르고 전열을 정비해야 한다. 박근혜를 퇴진시키고 난 후에 이름과 성격만 다른 박근혜를 또 청와대에 앉히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 다들 희망을 이야기하는 새해 초반이지만, 그 희망이 그저 연초에 나누는 ‘덕담’으로 머물지 않고 현실이 되려면 지금까지 가졌던 정치와 언론에 대한 관심을 거두면 안 된다. 촛불을 들고 광장을 메우던 그 마음을 느슨하게 하면 안 된다. 야당이 약속한 많은 개혁 입법 과제들도 촛불이 꺼지면 약속이 지켜지리라는 확신이 없다. 우리 그동안도 고생했으니 조금만 더 고생하자. 그래야 그 고생의 보람을 다 같이 맛볼 수 있다. 물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이 말 한마디씩은 아끼지 말고 해 주면서 말이다. “수고했어 오늘도.”

 

 

–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 대외협력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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