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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이 권하는 책] 무지한 스승 – 정정훈 변호사




 


 


  1.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책을 들라고 하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꼽을 것이다. 책은, 적어도 내게는, 충분히 도발적이었다. 그 급진적 도발은 망치가 되어 내 생각의 단단한 껍질을 간단히 깨버렸다. 랑시에르의 도발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인간은 지적으로 평등하다!


 


 


  2. 


     세계인권선언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 나는 이 제1조를 고쳐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누구나 “평등하다”는 매끄러운 허구적(가상적) 전제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울퉁불퉁한 현실을 근거로 시작해야 한다고, 선언의 규정을 “평등해야한다”는 규범적 의미로 읽을 때에만 현실과 선언의 간격을 인식하는 실천적 효력이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랑시에르는 이런 나를 한마디로 조롱한다. 해방하는 자가 아니라 그의 “원숭이”일 뿐이라고. 불평등을 전제로 평등을 지향해가는 ‘진보’는 단지 평등을 무한히 지연시킬 뿐이고. 그것은 불평등을 말하는 다른 방식일 뿐이라고. 불평등을 가지고 평등을 만들겠다는 것은 인민을 가르치는(지도) 것이고 결국 ‘지도’(가르침)로 ‘해방’을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진보의 방식은 불평등을 축소할 수는 있을지라도 결코 평등에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의 정치철학은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다시 출발하자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당장 입증될 수 있는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런 공리(의견)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직접 실천해가며 그 공리를 입증해가는 것만이 참된 해방의 방식이다.


 


 


  3.


     랑시에르는 평등으로부터 출발하자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1980년대 당시 ‘프랑스의 교육제도 논쟁’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 책의 소재가 되고 있는 조제프 자코토(1770~1840), ‘무지한 스승’은 평등이라는 정치철학의 문제를 교육에서의 ‘지적 능력의 평등’이라는 문제로 무대를 바꾸는 과정에서 소환된 19세기의 인물이다.


 


     프랑스에서 벨기에로 망명한 자코토는 1818년 루뱅대학에서 불문학 강사자리를 얻는다.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던 당시 벨기에 상황에서, 불문학을 강의해야 하는 자코토는 네덜란드어를 모르고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모른다. 불문학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무지한 스승’ 자코토는 『텔레마스코의 모험』이라는 책의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대역판을 학생들에게 주고는 번역문을 통해 학생 스스로 프랑스어를 배우라고 주문한다. 이 기이한 모험의 결과는, 결국 학생들이 작가 수준의 문장 구사력을 갖게 되었다는 놀라운 것이다.


 


     이 우연한 실험으로부터 발견한 ‘무지한 스승’ 또는 ‘보편적 가르침’은 이렇다. 스승은 지식을 설명하는 자가 아니라, 배우는 자 스스로 ‘앎의 원인’이 될 수 있도록 계기를 부여하는 자라는 것. 스승과 학생 사이의 지능은 전적으로 평등한 것이며, 그 차이는 ‘의지’에 놓여있다. 선생의 의지는 학생의 의지를 강제하지만 그것을 무화시키지 않는다. 스승의 의지와 학생의 의지가 관계 맺고, 학생의 지능과 책의 지능이 관계 맺는다. 의지와 지능의 관계의 이러한 분리가 ‘지적 해방’의 출발점이다.


 


     즉 스승과 학생의 관계는  지능과 지능의 관계가 아니라,  의지와 의지의 관계다. 선생의 지능이 우월하다는 교육학적 신화에서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설명하고 배우는 가르침의 관계이지만, 이런 지능과 지능의 관계는 ‘바보 만들기’에 다름 아니다. 의지와 의지의 관계는 빠른 길은 아니지만, 다른 길 즉 자유의 길이다. 학생이 앎의 주체가 됨으로써 스스로를 해방하는 관계다. 해방하지 않고 가르치는 자는 바보를 만들 뿐이다.  불평등을 무한히 연장할 뿐이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을 교육의 무대로 옮긴 결론은 이렇다. 무지한 자만이 스승이라는 것. 가르칠 지식이 없는 자만이 진정 타인을 해방시키는 ‘보편적 가르침’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랑시에르의 주장은 우리의 일상에 비추어도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가르치지 않아도 ‘말’하는 것을 배울 수 있고, 그와 동일한 의지와 지능을 이용해서 ‘글’이나 ‘그림’, ‘음악’을 배울 수도 있다.


 


     조금은 이상한(?) 비유를 이용해 랑시에르를 다시 말하면 이렇다. 어린이 집이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학원에 다니지 않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하면 아주 소수의 손이 올라가고, 다시 부모의 직업을 물어보면 ‘의사 아니면 변호사’라고 답한다는 이야기.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랑시에르의 주제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공부 좀 해본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다. 공부(또는 앏)는 ‘능력’이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것, 어려서부터 학원에서 주어지는 편한 설명에 길들여지는 것은 오히려 아이들의 공부하는 ‘의지’(앎의 의지)를 꺾어 시들게 하는 조장발묘(助長拔苗)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모두 아는 가장 최근의 사례는 ‘미네르바’의 경우다. 그의 알고자 하는 ‘의지’를 작동시킨 ‘무지한 스승’은 아마도 우리 사회였을 것이다. 그의 ‘의지’는 우리의 ‘지능’이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랑시에르 주장의 빼어난 사례다.


 


 


  5.


     랑시에르의 주장을 조금 얄팍하게 우리 사회에 적용하면, 아이들 “학원 보내지 말라”는 것이다.(‘무지한 스승’은 학교에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랑시에르와 동일한 관점을 다르게 이야기하는 사람으로는 이반 일리히가 있다. 최근에 다시 번역되어 출판된 일리히의 『학교 없는 사회』의 핵심 주장은, 제도로서의 학교는 ‘공부는 가르침의 결과’라는 잘못된 공리 위에 서있는 것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아이들 “학교 보내지 말자”는 주장이지만, ‘설명’은 공부가 아니라 불평등을 재생산할 뿐이라는 핵심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일리히와 랑시에르와 전적으로 동일하다.


 


     다만 그들의 차이점은 일리히가 제도로서의 ‘학교’에 주목하는 반면, 랑시에르는 관계의 ‘평등’이라는 정치철학에 더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또 일리히는 너무 성급하게 비학교사회로의 이행 가능성과 그 이행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랑시에르는 조금 더 세련된 방식으로 결론을 제시한다. ‘무지한 스승’의 ‘보편적 가르침’은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지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바로 그런 차이가 일리히를 읽으면서는 현실의 완강함에 비추어 이론의 허약함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하지만, 랑시에르를 읽으면서는 그 현실의 완강함 때문에 오히려 이론적(실천적) 가능성을 발견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아이들 학원 보내지 말자는 방식으로 랑시에르를 읽어도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더 나아가 ‘평등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자는 그의 제안에 동요될 수 있다면 아마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올해의 베스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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