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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이 권하는 책]보이지 않는 사람들 – 21세기 노예제, 그 현장을 가다




 


자,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현대 사회에도 노예제가 존재할까요? …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당신은 잠시나마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고민을 할 것이다. ‘예’라고 대답하자니 제2차 세계대전을 끝으로 전세계에서 노예제는 사라진 것처럼 생각될 터이다. ‘아니오’라고 대답하자니 질문에 무언가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추측이 들 것이다.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노예제는 현대 사회에도 존재한다. 다만 ‘노예제는 사라져야 할 것’이라는 전세계적인 공감대 때문에 ‘노예제는 사라졌다’는 착각에 빠지기 쉬울 뿐이다. 케빈 베일즈는 ‘일회용 사람들’(1999)이라는 책에서 전세계에 2,700만 명의 노예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국제노동기구가 2005년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아시아에서만도 1,000만 명의 노예가 존재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되지 않는 이유는, 불법으로 규정되면서 노예제는 음성화되거나 합법의 탈을 가장한 채 제도권 안으로 들어 왔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수치가 아니다.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이다”. 아무리 노예의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어떤 현실에 직면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노예제의 폐지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현실을 모르면 노예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ㅌ. 벤저민 스키너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 – 21세기 노예제, 그 현장을 가다’를 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전세계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노예들의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사회에도 노예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가 노예들의 실상을 보여주는 방식은 간단하다. 직접 전세계를 발로 뛰어다니면서 노예들을 만나고, 노예거래상ㆍ생존자 등과 인터뷰를 하면서 그 내용을 글로 남기는 것이다.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는 20리터짜리 물통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는 아이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더부살이라고 불리우는 이 아이들은 보수도 받지 않은 채 강제로 새벽부터 밤까지 일을 한다. 더부살이의 수는 1992년 11만 명에서 2002년 40만 명까지 늘어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고객(?)이 주문을 하면 중개인은 가난한 농민 가족을 찾아가 아이를 포기하라고 설득하는 일을 시작한다. 보통 아이를 잘 먹이고 가르치겠다고 약속하기만 하면 일은 순조롭게 풀린다. 아이티 도시민들은 가난하지만, 농촌 가족은 찢어지게 가난하기 때문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모는 학교에 보내 주겠다는 중개인의 약속을 믿고 아이를 중개인의 손에 넘긴다. 그렇게 넘겨 받은 아이를 중개인은 고객에게 판다. 미화 50달러에 말이다. 아이가 학교에 다닐 것이라는 부모의 믿음은 아이가 고객에게 넘겨지는 순간 환상으로 바뀐다.



 


무옹과 동생 가랑은 어머니와 함께 일자리를 찾기 위해 마을을 떠나 키르강 건너 북부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여행 둘째 날, 아랍 민병대원이 무옹 일행을 덮쳤고 그날부터 무옹 가족은 아다무사라는 아랍인의 재산이 되었다. 아다무사는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무옹 가족을 매질하면서 경작 일을 시켰다. 아다무사는 무옹의 어머니를 계속해서 겁탈했다. 1990년대 수단에서 일어난 일이다. 수단은 1924년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지만 1980년대 중반 내전이 발생하면서 폭력적인 습격에 의한 노예제가 부활했다.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20만 명 이상이 노예사냥의 희생자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수단 북부의 정부는 이러한 노예화를 남부의 결렬한 반란에 맞선 전쟁의 한 방편으로 묵인했고 종족말살의 수단으로 노예제가 활용되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수단의 반인류적 행위에 대해 침묵했다. 현재까지 수단에서는 노예사냥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아동 노예나 노예사냥과는 또 다른 양상이 동유럽에서 펼쳐지고 있다. 가난한 나라 루마니아에서는 2000년에 이르러 국민의 3분의 1 이상이 빈곤선 아래로 추락했다. 빈곤선 아래로 추락한 사람들은 꿈을 찾아 서유럽으로 이주를 했다. 그 가운데 여성들은 성노예로 전락했다. 타티아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타티아나는 전통적이고 평온한 정교회 신자 부모 밑에서 자랐다. 그런데 공산주의 몰락에 이은 경제적 혼란으로 인하여 타티아나 가족도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타티아나는 스물한 살에 대학의 역사,고고학부에 들어갔지만 일자리를 잃으면서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졌다. 타티아나는 남자친구인 루벤을 따라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그 때부터 타티아나는 성노예로 살아가게 되었다. 성매매의 대가로 벌어들인 돈으로 루마니아의 가족은 근근히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더부살이 소년이나 무옹 가족, 타티아나 이야기에 안타까워 할 것이고 혹자는 비현실적이라며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떠한 경우든 작가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이야기에 좋든 실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예제는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만큼은 일어나지 않는 일로 여겨지기 때문에 그 충격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만한 자극적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 현실을 고발함으로써 독자들이 발 벗고 나서서 지혜를 모으기를 기대하고 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무겁기를 작가는 의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현실을 돌아보자. 대한민국에서 노예제는 사라진 것일까? 중소기업의 인력난 해소를 위해 국가가 나서서 이주노동자의 수입을 중개하고 착취하는 행위는 합법화된 노예제가 아닐까? 결혼 목적으로 들어 왔지만 사실상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주여성들은 스스로 노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아닐까?








 


글_윤지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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