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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공감소송당사자 이야기] 8년의 투쟁 끝에 얻은 자유 그리고 꿈 – 난민지위 인정받은 마웅저씨를 만나다.



 


난민,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시민을 향해 발포하는 군인들, 민주화 운동가를 탄압하는 독재군부, 여성‧소수자에 대한 탄압, 종교·언론·출판 자유에 대한 억압과 함께 가해지는 생명에 대한 위협. 인종, 종교, 국적,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충분한 근거 있는 공포를 가지고 위기 상황을 피하고자 외국이나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난민’이라 부른다. OECD 30개국은 평균적으로 인구 1,000명 당 2명 수준으로 난민을 보호하고 있지만, 2008년 말을 기준으로 한국은 난민신청자의 단 5%로만을 난민으로 인정하며 인구 100만 명 당 2명 꼴로 난민을 보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비율로 볼 때,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은 힘들었던 8년간의 투쟁 끝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버마(미얀마)의 마웅저 활동가였다. 94년 버마에서 한국으로 망명하여 이주노동운동, 버마 민주화 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버마 어린이․청소년 교육운동에 힘쓰고 있는 그의 다양하고 화려한 운동경력 때문에 ‘투사’의 이미지가 언뜻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마포에 위치한 ‘따비에’ 사무실에서 만나본 그는 너무나 푸근한 인상으로 우릴 맞아주었다. 


 





마웅저, 그의 조국 버마



마웅저 씨의 조국인 버마는 1948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민주주의 국가였으나 1962년 쿠데타가 일어나 독재 군부가 집권하게 되었다.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진 버마는 한국의 87년 6월 항쟁과 같이 88년 8월, 일명 8888항쟁으로 민주화를 쟁취하였다. 마웅저 씨는 고등학생 시절 8888항쟁에 뛰어들었는데 자신은 8888항쟁 당시 수 천 명 중 한 명이었을 뿐이라며 당시 ‘부패한 이들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라는 사회 분위기가 전반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선배를 잘못 만나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88년의 승리도 잠시, 군부는 아웅산 수치가 이끌었던 민족민주연합(NLD)이 승리한 총선을 무효화시키고 군부독재를 이어가며 국명까지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어버렸다. 버마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 되어갔다. 군부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지원자가 없는 군대에 인원을 보충하고자 밤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붙잡아 감옥과 군대 둘 중 하나를 택하길 강요하기에 사람들이 밤에 쉽게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마웅저씨는 말했다. 집에서 먼 곳으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 학교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군대로 끌려가는 경우도 빈번히 일어났다고 한다. 1990년부터는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늦어도 3년 안에 석방되던 민주화운동가들이 2-30년 형을 언도받기 시작했다. “저녁에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가 그 다음날 아침이면 사라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면서 밤에 누군가 자신을 잡으러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언제 잡힐지 모른다는 정신적 고통 속에서 살아야 했다.”고 마웅저 씨는 말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족과 지인 모두 그에게 다른 나라로의 망명을 권했고, 1994년 박해를 피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버마의 군부독재는 지속되고 있으며 위의 상황들은 현재진행형이다.


 


 
 


 


한국, 이주노동 그리고 버마 민주화의 불씨


 


 마웅저 씨가 망명국가로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민주주의 국가라는 점과 한국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의 사정은 열악했기에 기댈 수 없었고, 망명을 하는 과정에서 가족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마웅저 씨는 공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 달 정도는 일을 하며 후회를 많이 했다고 한다. “민주화 운동이 하고 싶은데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비관스러워 야간에 기계 돌아가는 소리 속에서 혼자 울기도 하고 소리치기도 했다”며 당시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이주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대우 또한 견디기 힘든 점이었다. 당시 “일하던 공장에서 6개월 치 월급을 받지 못 했는데 다른 친구들과 비교해 봤을 때 그 정도는 양호한 편이었다.”며 열악했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던 중, 사장을 칼로 찌르거나 공장에 방화를 하는 등 이주노동자들의 불만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마웅저 씨는 이러한 극단적 표출이 열악한 상황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보고 96년경 사람들과 함께 이주노조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운동을 진행하던 중, 버마의 옛 동지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98년에는 버마 민주화 운동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민족민주연합(NLD) 한국지부를 만들어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시위, 캠페인, 국회 방문, 8888항쟁 기념일 행사 등 여러 민주화 운동을 진행하였다. 그러면서 노동대학, NGO대학에 다니면서 한국의 활동가들과도 교류를 맺게 되었다. 마웅저 씨는 한국의 활동가들과 함께 하면서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길 중 ‘정치운동 외의 다른 길’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 일환으로 버마의 시민들이 소통할 수 있는 장을 열고자 07-08년 ‘함께하는 시민행동’에서 활동을 하며 버마에 라디오를 보내는 피스라디오 운동을 진행했다. 옆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를 정도로 버마사회는 소통의 부재가 심각한 상황이다. 마웅저 씨는 “언론 소통의 장을 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난민지위신청, 8년 간의 긴 싸움


 


 그러나 마웅저 씨의 이런 운동들이 순탄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활동을 막 시작했을 무렵인 99년, 00년 같이 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이 강제추방을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어떻게 하면 그들을 구하고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난민신청’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 전까지는 난민이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에 NLD활동가들 스스로 난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아 신청할 당시에도 내부에서 반대가 거셌다고 말했다. 2000년, 우여곡절을 거쳐 NLD회원 20명이 법무부에 난민신청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난민신청당시에는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받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제대로 제도가 정비되어 있지 않기에 신청이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 심사관 두 명이 신청자 스무 명을 하루에 심사하고는 했는데, 처음으로 심사 하는 사람은 1시간 정도를 소요하고 그 이후로 점점 시간이 줄면서 마지막에 하는 사람은 10분, 15분 정도로 심사를 마치곤 했다. 게다가 심사를 받는 동안 가장 많이 조사를 받은 사람 중 한 명이 마웅저 씨였는데 5년간 5번의 심사를 받았다고 했다. 5년의 기간 동안 1년의 한번 꼴로 심사가 진행된 것이다. 통역의 문제도 있었다. 법무부에서 소개해준 통역원은 인권과 정치에 대해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얀마 정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 모두 두려움에 떨며 통역을 거부해서 결국 마웅저씨가 통역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밖에도 법무부에서 난민신청자들에게 신문, 사진, 감옥에 있었다는 감옥증명서 등을 요구했는데 이는 고국에서 도피해온 난민들이 실질적으로 구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장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심사기간 중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아 생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도 고달팠다고 말했다. 이는 현재 일부 개정되어 난민지위신청 판단이 ‘1년 이상’ 지연되는 경우에만 법무부에서 취업활동 허가를 ‘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그 1년의 생계는 어떻게 유지하라는 건지 허탈하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심사 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점은 “활동가들이 진지하게 민주주의나 버마 군부독재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농담하는 것처럼 우습게 여기는 심사관들의 태도였다”고 마웅저 씨는 말했다.  


  




 


 


그러다 03년 NLD 한국지부의 회장, 부회장, 총무가 난민으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웅저 씨는 기쁜 소식이긴 했지만 “NLD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운동하고 똑같이 조국의 박해 속에 놓인 처지인데 그들만 인정을 받아 섭섭하고 속이 상했다”며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다른 나라로 망명한 활동가들이 난민 인정을 받는 것을 보며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용기가 부족해서 버마에서 한국으로 도망 왔는데 여기서 또 도망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계속 도망 다니면 결국 난 어디로 가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내가 한국을 떠나는 일은 버마로 향하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NLD 간부들이 인정받은 것을 보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05년 법무부는 결국 ‘이들은 버마에 가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라며 다른 NLD 회원들에게는 난민인정불허 판정을 내렸다. 버마의 민주화 운동 탄압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 하는 그들에게 마웅저씨는 “버마에 한 번이라도 가보았냐”고 물은 적도 있다고 했다. 버마로 추방된다면 몇 십 년을 감옥에서 살아야 할 것이고, 그 곳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지내야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그들은 법무부에 불허처분취소 소송을 냈다. 다시 시작된 지난한 싸움, 통역 없이 진행되는 재판, 소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한 시간 등 다시 3년의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08년 값진 승리를 얻어 난민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마웅저 씨는 난민으로 인정받고 난 후, 마음이 너무 편안해졌었다고 말했다. 강제추방의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됐고, 소송의 부담도 덜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정부가 버마의 현 상황을 이해하고, 우리의 민주화 운동을 인정하는구나.”라는 기쁨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미흡한 난민제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난민제도가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홍보가 필요하고, 제한 없는 심사기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며, 난민의 교육, 취직 문제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원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송을 함께 진행했던 공감에게 바라는 점을 물으니 “내 욕심으로는 이주민, 난민 중심의 문제해결에 활발히 지원해주셨으면 좋겠지만, 그럼 다른 소수자의 문제는 누가 해결해주겠는가. 공감의 변호사님들이 많아지셨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따비에, 어린이가 행복한 나라




  

 


2002년부터 버마 어린이 교육 운동을 해온 마웅저 씨는 현재 버마 어린이·청소년 단체인 <따비에>의 대표를 맡아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따비에>는 버마에서 평화와 행복을 상징하는 나무의 이름으로, 버마 어린이·청소년을 위해 힘쓰는 단체이다. 주로 태국과 버마 국경의 난민촌인 메솟에서 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난민촌 학교재정지원, 의료지원 등을 하고 있다. 마웅저 씨는 버마는 원래 동네마다 도서관이 있는 나라였지만, 군부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정보를 얻게 되면 자신들에게 대항할 것이라는 생각에 마을의 도서관을 모두 공공기관으로 바꾸어버리고 파괴했다고 설명하며 다시 버마에 마을 도서관을 세우는 사업을 진행 중이라고 했다.


 


 또한 마웅저씨는 사회주의 국가인 버마는 겉보기엔 무상교육이지만, 책 값 등의 천원, 이천원을 내지 못 해 3-40%의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으며 점점 문맹률이 늘어가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역사책 또한 버마를 지배하고 있는 “군부 중심의 이야기로 학생들은 왜곡된 역사를 배우고 있고, 버마의 수많은 소수민족의 역사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출판의 자유 또한 억압되어 아이들을 위한 책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에 현재 <따비에>에서는 한국의 동화를 번역하여 버마에 보내는 사업도 기획 중에 있다고 했다. 



한국의 청소년들과 버마-태국 국경 지방의 난민촌 메솟을 방문하여 버마 어린이·청소년과 교류하는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를 진행하며 한국청소년의 교육문제도 함께 생각해보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마웅저 씨는 “버마로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된다면 현재 버마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 뒤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기술이나 기회,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따비에> 활동에 꾸준히 벌이고, 한국과 버마사회의 연대운동을 해보고 싶다며 앞으로의 꿈을 말했다.  
 
난민, 그들은 불쌍하고 가난한 이들이 아닌, 박해 속에서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주장하는 용기 있고 강인한 사람들이다. 시민의 손으로 쟁취하는 조국의 민주화를 열망하며,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마웅저 씨에게서 군부독재 시절 우리나라를 떠나야만 했던 민주화 운동가들이 모습이 떠올랐다. 타국에서 난민으로 살며 나라의 민주화를 도왔던 그들의 손을 잡아준 외국인들.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따스한 손을 내밀 때가 아닌가 싶다.


 



 



글_이소연(13기 인턴)


정리_여동근, 이수정, 임수진, 이종희, 김건(13기 인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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