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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장애인권

경계선 위에서 필요한 판단

  이른바 염전노예로 명명된 사건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장애인, 특히 지적장애인에 대한 착취를 방조하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지적장애인의 장애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행위는 비단 외딴 섬에서만 폭력적인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L씨는 지능지수가 낮았다. 어려서부터 또래들과 어울리기 힘들었고 학업은 부진했다. 초등학교를 마칠 무렵 특수학교로의 진학을 권유받았으나 어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중학교를 마칠 무렵 어머니를 여의었고 자식을 돌볼 능력이 없던 아버지 곁을 지키며 극악의 주거환경에서 연명해왔다. 어느 날 찾아온 배다른 언니는 L씨 명의의 생명보험을 가입했으니 월 5만원의 보험료를 납부해야 한다고 통보한다. 오며가며 알게 된 같은 동네의 건강원 사장은 자신의 일을 돕는 조건으로 한 달 5만원을 주겠다 제안하였고, 이후 7년 넘게 L씨는 건강원에서 일을 했다.

 

  사장은 L씨를 때리거나 학대하지 않았다. L씨와 외출도 함께했고 때때로 밥을 사기도 했다. 점차 일에 익숙해진 L씨에게 6개월마다 5만원씩 돈도 올려줬다. 일을 그만둘 무렵 L씨의 한 달 수입은 50만원에 달했다.

 

  하지만 L씨 입장에서 건강원 일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100kg에 달하는 각종 약재를 세척하고 몇 시간씩 구덕 앞에서 쪄내고 즙을 만들어 포장된 상품을 카트에 싣고 아파트 단지로 배달을 다녔다. 격주에 한 번씩 일요일에도 일을 나갔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 날도 부지기수였다. 과로로 인해 대상포진에 걸린 날도, 일이 밀린다는 사장님 걱정에 건강원을 나갔다. 녹즙기에 손가락 끝이 잘리기도 했지만 자신의 잘못이라 여기고 보험금을 해약해 치료비 160만원을 사장님께 돌려주기도 했다.

 

  이 모든 일에 지쳐 일을 그만두고 만나게 된 지인은 L씨의 이야기에 분노했다. 지인의 도움을 얻어 L씨는 노동청에 최저임금을 지급해달라는 진정을 넣었다. 다행히 L씨가 틈틈이 작성한 업무일지가 증거가 되어 근로시간이 산정되었다. 최저임금법을 위반하여 미지급한 임금은 6300만원에 달했다.

 

  사장은 착취가 아니다, 장애도 몰랐다, 그 애가 날 좋아했다, 호혜적 관계에서 일을 조금 돕고 용돈을 주었을 뿐 근로관계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법원으로 넘어간 사건은 근로관계가 인정되고 미지급 임금이 있으나, 최종 3개월을 제외한 69개월에 대해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고 보아, 398만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L씨는 지능지수가 70 근방의 ‘3급 지적장애인이다. 13세 언저리의 사회적 연령. 낯을 많이 가리지만 일상적인 대화가 가능하고 금전 개념도 아예 없지는 않다. 만시지탄이지만 노동청 진정도 하기는 했다. 근로복지공단이니 법률구조공단이니 찾아다니며 법적 대응도 했다. 뒤늦게 깨달은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보고자 최대한 열심히 진술했다. 진술서가 어떻게 작성되었는지 꼼꼼히 살펴보기도 했다. 이러한 L씨의 노력은 모두 법정에서 불리한 사실이 되었다. 법원은 “(L씨에게) 제한능력자에 버금가는 지적장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경계선 지적장애가 있어 일상생활을 하기에 일부 부족한 부분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임금청구도 스스로 못할 정도로 판단능력이 부족한 지려천박이나 심신장애는 아니다.”고 판단 이유를 밝혔다.

 

  L씨의 장애 정도만이 아니다. L씨의 사건 자체가 경계선(/)상에 있다. 그 경계위에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대립한다.

7년 동안 일을 시키고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았지만 (/) 표면적인 학대는 없었다. L씨의 사리분별이 충분치 않지만 (/) 지적 능력이 아예 없지도 않다. 사장과 근로자라는 갑을관계에서 부당한 일들이 있었지만 (/) 노예와 같은 관계는 아니었다. 5만원을 대가로 한 달 내내 일을 한다는 계약은 결코 일반적이지 않지만 (/) 둘이 합의해서 그러기로 정한 일이다. 7년간 꾸준히 출근한 것은 사실이나 (/) 건강원의 일이 엄청난 노역이라 보이진 않는다.

1심 법원은 이러한 전제에서 임금채권의 소멸시효 만료 부분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를 지급하는 수준이 합리적인 결론이라 본 것 같다.

 

  경계선 위에서 판단은 뒤로 흘렀다. 이러한 법원의 결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장의 지독한 악의에서 비롯된 노예에 준하는 강제노동과 학대, 거기에 장애인의 무지몽매에 가까운 지적 수준이 결합할 때 비로소 법적 구제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사장에게는 명명백백한 악의가 드러나지 않는 이상 계약의 자유가 인정된다. 장애인으로서는 지적장애의 정도가 심하지 않는 이상 계약 조건을 스스로 잘 살펴야 한다. 책임은 당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염전노예와 같은 사건은 극히 예외적이다. 대다수의 사건들은 경계선 위에 존재한다. 경계에 놓인 사건에서 법원은 어떠한 판단을 해야 하는가. 누구를 보호하고 누구에게 경고를 해야 할 것인가.

 

  공감은 L씨 사건의 2심을 맡아 부당이득반환청구를 했다. 부당이득반환청구권의 소멸시효는 10년이다. L씨가 사장에게 제공한 근로의 정도에 비추어 사장이 L씨에게 지급한 금원은 현저히 공정을 잃었기에 그 부족분, 법률상 원인 없이 취득한 부분을 돌려달라는 것이다. 경계선 위의 사건에 대해 1심과는 다른 판단이 절실하다.

글_ 김수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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