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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로시간# 반도체노동자# 반도체특별법# 취약노동

타이완의 노동기준법과 한국의 반도체특별법

반도체 기업이 근로시간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핑계 중 하나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불리하다는 것이다. 반도체 수탁 생산(파운드리) 1위 기업인 타이완 TSMC가 자주 비교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이번엔 타이완 노동기준법(勞動基準法, 한국 근로기준법에 해당)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타이완 노동기준법은 한국 근로기준법에 비해 기업 입장에 유리하지 않다. 타이완 노동기준법에도 주 40시간, 일 8시간의 근로시간 상한이 있다(타이완 노동기준법 제4장 근로시간, 휴식, 휴가 제30조 제1항). 이를 위반할 경우 2만 위안 이상 100만 위안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타이완 노동기준법 제79조 제1호).

연장근로의 상한은 1주간 48시간이다(타이완 노동기준법 제79조 제30조 제2항, 제3항). 한국 근로기준법은 주 52시간까지 연장 가능하다. 오히려 한국의 반도체 노동자가 법률상 더 긴 시간 일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왜 TSMC를 따라잡기 위해 근로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올까? 여기서부터는 추측할 수밖에 없다. 타이완 노동기준법도 책임은 있다.

노동기준법 부칙에서 ‘책임제 전문직(責任制專業人員)’ 등에 “중앙 주무기관이 심사하여 정한 뒤 다음 각 관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근로를 공고하는 경우 노사 양쪽은 근로시간·정기 휴무일·휴가·여성 근로자의 야간 근로에 대하여 별도로 약정을 체결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하여 현지 주무기관에 보고하여 심의를 받는 경우에는 제30조·제32조·제36조·제37조·제49조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타이완 노동기준법 제84조의1)”고 정하고 있다.

형식만 봐도 어딘가 이상하다. 법체계를 생각하는 법률 입안자라면, 부칙에 노동기준법의 주요 규정의 예외를 정하는 조항을 둘 수 없다. 총칙에 두거나 최소한 노동시간 등을 규정한 제4장에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형식만큼이나 내용도 행정부에 의해 노동기준법이 무력화될 수 있는 조항이기에 문제가 있다.

중앙 주무기관의 책임도 있다. 마치 최근 한국 고용노동부가 반도체 산업의 64시간 특별연장근로를 우회적으로 허용했듯이 말이다. 한국 고용노동부는 형식적으로는 근거법률을 따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근거법률인 근로기준법을 위반하여 과로를 조장, 아무리 적게 보아도 방조했다.

 

과로는 사람을 천천히 죽인다

한국에서 특별연장근로를 하다가 사람이 죽으면 그 책임은 누가 질까? 법률적 책임은 1차적으로 사회가 진다. 공적 보험인 산재보험에서 돈이 나간다. 물론 산재로 인정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과로사가 과로사로 인정받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최악의 경우 법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법률적 책임은 2차적으로 회사가 진다. 그러나 회사의 지시와 죽음 사이의 촘촘한 인과관계를 밝히기는 더 어렵다. 산재 인정과는 달리 민사 손해배상에서는 근로자가 이미 피로했거나 가족력이 있었다면, 인정된다고 하여도 감액된다.

돈 때문에 소송을 하지 않아도 사람이 고생고생하다 죽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감액이 되면, 위와 같은 법률적 절차를 거치는 동안 유족들이 감당해야 할 마음의 상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크다.

여기서 특히 문제가 되는 점은 고용노동부나 그 장관은 산재노동자나 산재유족에게 아무런 법적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책임 없는 고용노동부가 더는 무책임해지지 않도록, 특별연장근로사유를 고용노동부가 만드는 시행규칙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에 규정하도록 하는 입법안이 2025년 4월 24일에 발의되었다.

 

법위반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과 방조하는 국가

타이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타이완 노동기준법 시행세칙은 위에서 말한 책임제 전문직을 정의하고 있다. 책임제 전문직(타이완 노동기준법 시행세칙 제50조의1 제2호)은 특정 작업을 완료하기 위해 전문 지식이나 기술을 사용하고 해당 작업의 성공 또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는 근로자를 말한다.

필자는 타이완 주무부처에서 노동기준법 제84조의1 제1호를 근거로 하여 과로를 허용했는지, 허용했다면 어느 범위에서 누구까지 허용했는지의 사실 여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만약 반도체 노동자의 근로시간 연장을 허용해달라는 주장을 했던 사람들의 주장대로 TSMC 개발자들이 3교대 24시간 근무, 크런치모드(휴식시간 없는 무제한 연장근무)를 타이완 주무부처에서 허용했다면, 위 시행세칙과 노동기준법을 모두 위반한 것으로 보인다.

시행세칙에서도 “해당 작업의 성공 또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는 근로자”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는 최소한 팀장이나 부장급일 것이며, 만약 저 책임이 경영상 책임이라면 이사급 이상일 것이다.

다행히도 2024년 12월 11일 보도된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TSMC는 한겨레에 한 서면 답변에서 “연구개발팀은 24시간 근무하지 않는다. 팹(FAB·반도체 생산라인)은 업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24시간 운영된다”고 밝혔다.

2025년 2월 4일 자 <경향신문> 등의 기사에서는 ‘대만 TSMC, 근로시간 위반으로 벌금… 불법을 경쟁력으로 포장 말아야’라는 기사도 보인다.

같은 해 4월 22일 <한국경제>에는 성과급과 이익공유까지 포함하면 TSMC의 1인당 평균 총보수는 581만 대만달러(약 2억 4700만원)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한국일보>는 2024년 12월 10일 ‘TSMC 창업자, 尹 불법 계엄 두고 삼성전자 경영에도 역풍’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자. 일각에서는 A기업의 경력직 전문기술자들이 다른 기업으로 이직해서 인력수급이 어려워지자 남은 인원으로 무리하게 돌리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지금과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돈다. 이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 남은 전문기술자들마저도 소진되거나 이직할 것이다.

반도체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무한정 늘려달라는 주장은 권한과 책임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최근 본인의 지방자치단체가 역대급 대형 산불이 나도 휴가를 내고 대선 경선에 참여하는 지방자치단체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정작 일해야 할 사람이 일하고 있는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책임지고 있는지를 돌아볼 때이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노동안전보건 월간지 <일터> 5월호와 5월 19일자 오마이뉴스(반도체 경쟁력 위해 노동자 과로 불가피? TSMC가 말해주는 진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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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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