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자원활동가의 활동] ‘장애, 시설을 나서다’ 북토크 참석 후기
우리는 왜 주변에서 장애인을 보기 어려운 걸까? 아무리 문화적 동질성과 단일 민족성으로 많이 알려진 한국이라 하더라도, 학교나 대중교통 등 공공장소에서 장애인을 이토록 보기 힘든 나라는 드물다.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열린 ‘장애, 시설을 나서다’ 북토크는 그런 현실에 대해 다시금 질문을 던지게 했다. 이 북토크는 단순한 책 소개를 넘어, 변호사, 활동가, 교수님들과 함께 장애와 탈시설을 주제로 깊이 있는 의견을 교류하는 자리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너무도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시설’이라는 공간의 의미와 그 반인권적 구조에 대해 성찰할 수 있었다.
북토크에서 인용된 여러 구절 중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김재형 교수님의 요약 글이었다.
“국가가 부랑 집단을 통제할 수 있었던 데에는 국가가 그럴 수 있는 권력을 독점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가 사회의 치안과 위생 그리고 발전을 위해 그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국가에 통제를 요구하고 수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의 이러한 태도는 노동하지 않는 자와 빈곤층에 대한 혐오와 반감에서 비롯한다.”
생산성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하지 않는 사람은 종종 ‘존엄한 존재’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 위 구절은 장애인이 배제되는 구조도, 결국은 노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사회의 혐오와 반감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사회는 종종 그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립할 수 없는 존재, 이성이 결여된 존재, 혹은 나와는 다른 ‘타자’로 규정한다. 그리고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편리한 방식으로 그들을 ‘시설’에 보내버린다. 국가는 시설을 운영하면서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국가의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시설이지만, 그 안의 인권 침해는 방치된다.
이처럼 시설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단지 운영상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시설’이라는 구조 자체가 가진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무리 쾌적한 환경을 갖춘 시설이라 하더라도, 그곳은 인간이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책에 소개된 당사자 조상지님이 들으셨던 “네 자리는 여기야”라는 말처럼, 누군가가 나의 자리를 정해주는 삶을 우리는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설은 지속적으로 사회가 소수자를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데에 사용한 도구이며, 그 안에서 소수자는 최소한의 자율성과 존엄조차 빼앗긴다.
시설 문제는 장애 분야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아동, 노인, 홈리스 등 사회적 소수자 전반에게 적용되는 구조다. 소수자를 격리시킴으로써 불편을 감추고자 하는 사회, 그리고 그러한 정책이 경로의존의 궤도 위에서 반복되어 온 현실은 자명하다. 행정학을 전공하는 학생으로서, 최태현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경로의존과 행정부담에 관한 설명은 나에게 반가움과 동시에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많은 정책을 제안하는 자리에서 활동가인 저는 이런 평가를 듣습니다. 너무 비현실적이다. 파격적이다. 이상적이다. 아직 준비가 안됐다. 속도가 빠르다, 천천히 가야한다. 점진적으로 가야한다….. 저는 점잖은 이런 이야기들이 결국 ‘경로의존’에 취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점진적인 것이 안전하다가거나, 실패가능성이 낮다는 일반적인 선입견이 (때론 공무원들이 이런 이야기 할때마다 진짜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시설과 탈시설의 논쟁에서는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책 결정자들의 안전지향적 태도는 종종 현실을 고착화시키고, 탈시설이라는 변화의 동력을 가로막는다. 결국 우리는 시설 밖의 삶을 이야기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장애인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최근 대두되고 있는 또다른 거주시설의 형태인 그룹홈에 대한 논의도 오갔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 김정하님은 “그룹홈은 사실상 소규모 시설일 뿐”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여전히 타인과 함께 살아야 하는 주거 형태인 그룹홈을 과연 비장애인이라면 흔쾌히 선택할 수 있을까? 북토크에서 “시설 너머의 삶을 알아야 자립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 나왔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장애인을 위해 진정한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준비하지 않는 사회는 장애인에게 ‘선택권’을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산’이다. 장애인 자립지원은 돈 없이는 불가능하다.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활동가 김정하님은 탈시설을 위한 예산은 현재 운용되는 시설 유지 비용 등을 합친 예산의 약 1.8배 수준일 것이라고 언급하며, 이는 탈시설이 갖는 인권적 중요성을 고려하면 결코 감당 못할 수준이 아니라고 언급하였다.
이번 북토크를 통해 『장애학의 도전』에서도 언급된 ‘연립’하는 사회와 탈시설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탈시설을 통해 장애인이 ‘자립’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 이외에도, 연립하는 공동체를 만들어간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장애인의 자립을 지원하고, 그 현장에서 또다른 사람은 지원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는 사회. 획일화된 사회의 기준이 아닌, 또다른 기준을 갖고 있는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통해 모두가 연립하는 존엄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길 바란다.
글 _ 이수민 (공감 41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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