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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여성인권

환자, 진료의 객체에서 인격적 존재로 – ‘진료과정의 성희롱 예방기준 마련을 위한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

원본 출처: Seattle Municipal Archives on Flickr.com

 

 

  의료행위 도중 이루어지는 성희롱과 성추행은 주변에서 단편적으로 듣는 사례나 단신 기사를 통해 알려진 사례가 있을 뿐, 우리나라에서 그 실태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실태 파악이 안 되어 있으니 대책도 없다. 여성 환자들은 진료과정에서 성희롱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여성의 몸을 다루는 의사. 몸에 대해 말하고 신체적 접촉이 이루어지는 진료행위와 성희롱의 경계는 모호할 수밖에 없다. 진료 과정 중 의사의 발언이나 신체적 접촉으로 성적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껴도 뭐라 말하기 어렵다. 특히 ‘권위’를 가진 의사와 의학 지식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간주되는 환자와의 관계가 위계적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 정윤진, “병원은 성희롱 사각지대? – 환자에 대한 성희롱 실태부터 파악해야.”, 여성주의 저널 ‘일다‘ )

 

 

  10년도 더 전인 2003년에 쓰인 글의 일부이다. 여기서 말한 진료과정의 성희롱 실태조사와 예방기준 연구가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의 발주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한국성폭력상담소’, ‘건강과 대안’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진료과정의 성희롱 예방기준 마련을 위한 실태조사결과발표 및 토론회’가 지난 4월 17일, 국가인권위원회 인권교육센터에서 열렸다. 나는 “의사가 배를 여기저기 만지고, 주물럭거리는 거지 뭐야!”라는 한 친구의 생소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뭔지 정확히는 표현할 수 없지만 떠올랐던 무언가와 언젠가부터 바지를 내리고 주사를 맞는 게 꽤나 껄끄러운 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토론회 장소로 향했다.

의료기관 이용자의 진료과정 성희롱 경험 실태  – 빈번한 성희롱과 이에 대한 대응의 어려움
 

  이날 프로그램은 실태조사에 대한 결과발표와 이에 대한 토론자들의 의견 및 상호 간의 질의응답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백미순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의료기관 이용자의 진료과정 성희롱 경험 실태에 대한 발제를 맡았다. 이번 조사에서는 성희롱을 ‘일반적으로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성적 언동으로 상대방에게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일으키는 것’으로 정의하였고, 의료현장에서 일어나는 광범위한 상황을 고려하기 위해 성폭력 또한 포함하였다. 또 의료진이라 함은 ‘의료인 또는 의료기사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백 소장은 의료진들의 진료과정에서 의료기관 이용자가 상황별로 느끼는 성적 불쾌감이나 성적 수치심 경험을 조사하였음을 밝혔다.

 

 

▲ 4월 17일에 열린 ‘진료과정의 성희롱 예방기준 마련을 위한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최근 5년 이내에 의료기관을 이용한 경험이 있는 19~59세 성인 여성 1,000명 중 11.8%가 진료 시 성적 불쾌감이나 성적 수치심을 느낀 적이 있다고 답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진찰 또는 검사를 위해 옷을 갈아입는 과정에서 과다한 신체 노출과 폐쇄적인 공간으로 인해 느끼는 불쾌감, 사전 설명 없이 진료과정에서 신체 부위 접촉 등으로 인해 빚어지는 성희롱, 통상적인 진료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 ‘신체적 성희롱’, 마취 상태의 의식이 없는 환자에 대한 성희롱, 환자의 외모 평가 등으로 나타나는 ‘언어적 성희롱’, 환자 가족에 대한 성희롱, 그리고 이것들이 혼재된 복합적 성희롱 등의 다양한 경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성적 불쾌감이나 성적 수치심을 경험한 후의 적극적 대응의 빈도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거나(52.5%), 해당 의료기관에 다시 가지 않았고(31.4%), 그 이유로는 진료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경우(46.9%)가 가장 많았고, 적극적인 대응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30.2%), 대응 방법을 몰라서(16.7%)가 뒤를 이었다.


 백 소장은 특히 의료기관 이용자 입장에서 문제 제기가 어려움을 지적했다. 성희롱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부족하다. 특히 진료과정의 경우에는 의료행위에 대한 지식을 지닌 의사의 권위라든지, 이용자로서 지속적인 진찰을 받아야 할 필요성 속에 문제 제기가 어렵고, 의사를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설령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성희롱을 입증할 방법이나 증거가 부족하고 처리 절차 또한 불명확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회피하게 된다.


진료과정 성희롱에 대한 의료진들의 실태 조사 – 의료기관 이용자와의 인식 차이

  다음으로, 이상윤 건강과 대안 책임연구원은 진료과정 성희롱에 대한 의료진들의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하였다. 의사, 한의사 200명과의 심층 인터뷰를 토대로 한 이번 조사를 통해 성희롱에 대한 의료기관 이용자와 의료진 간의 인식 및 판단의 차이가 드러났다. 우선, 의료기관 이용자들이 자주 경험한 상황과 의료진들이 생각하기에 자주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상황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였다. 의료기관 이용자들은 진찰 과정에서 불필요한 신체 접촉을 상대적으로 자주 경험한다거나 불필요하게 환자의 몸을 드러나게 하는 상황이 빈번하다고 응답하였으나, 의료진들은 이러한 상황들이 빈번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이는 ‘의학적으로 필요하고 정당화될 수 있는 것’에 대해 의료진과 의료기관 이용자, 두 집단 사이에 상당한 인식 및 판단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의료진들은 실제 진료과정에서 성희롱으로 판단할 만한 사례는 과거와 비교하면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의료진 입장에서는 진료에 있어 꼭 필요한 말이나 행동도 환자가 이를 불쾌하게 여기거나 굴욕감을 느낄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하고, 특히 예민한 부위의 경우 오해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의료진들은 진료과정 성희롱 여부를 의료기관 이용자의 개인적인 성적 굴욕감 또는 수치심을 중심에 두고 판단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료기관 이용자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진료 행위 위축이나 방어 진료 등으로 오히려 환자에게 피해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료진들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대체로 공감하였다. 의료진들이 환자가 성희롱이라고 느낄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소통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의사소통을 증진하기 위한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보였다. 그동안 대학 교육 과정, 수련과정, 보수 교육 과정 등을 통틀어 진료과정 성희롱을 예방하기 위한 지식, 기술 등을 습득하기 위한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지를 묻는 문항에 21.5%만이 이수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고, 특히 연령대가 높을수록 관련 교육 경험이 적은 것은 의료진 내부의 지식 및 인식 확산이 필요하다는 의견으로 이어졌다. 또한, 의료진들은 환자들 역시 진료과정에서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지적하였다.


진료과정 성희롱의 규제 현황과 대안 – 진료상 필요성이 성희롱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김정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객원연구원은 진료과정 성희롱의 규제 현황과 대안에 대해 발표하였다. 우선 의료법과 의료기사 등에 관한 법률에서 ‘품위를 심하게 손상시키는 행위를 한 때’라는 추상적 규정에 한하여 자격정지 1개월 만이 적용될 수 있고, 대한의사협회의 의사윤리지침에서 성희롱 관련 항목이 모두 삭제되는 등 진료과정 성희롱에 대한 기존의 법적·자율적 규제가 미비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어 차별시정기구의 진정례, 결정례 및 판례 45건을 분석하여 단 1건만이 성희롱으로 인정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기각 혹은 각하 결정을 받았다며, 진료상 필요성이라고 하는 특수성 때문에 성적 함의를 입증하는 것이 실제 사례에서는 쉽지 않음을 밝혔다.


  이에 따라 김 연구원은 성희롱 여부의 판단에서 나타나기 쉬운 “진료상 필요인가, 진료상 편의인가”의 대립구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논점을 제기하였다. 진료상 필요성과 성적 함의와 관련하여 다음의 세 가지 경우를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① 진료 관련성은 있으나 진료상 필요성을 넘어선 언동 속에 성적 함의가 인정되는 경우, ② 진료상 필요 범위 내의 언동이면서 진료 목적과 성적 의도가 공존하는 경우 ③ 대체 가능한 다른 진료 방법을 사용하지 않을 때 성적 함의가 인정되는 경우. 여기서 우리는 기존의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강조되기 쉬운 진료상 필요성이 곧 성적 함의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진료상 필요성이 아닌 진료상 편의에 따른 의학 지식 및 진료 방법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동시에 김 연구원은 진료과정 성희롱의 규제 방안과 관련하여서 의료진과 의료기관 이용자 사이에 존재하는 상황별 성희롱에 대한 인식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좁혀질 가능성 또한 남아 있음을 강조하였다. 설문에서 제시한 상황들에 대해 성희롱으로 인식할지 여부와 관련하여 의료진의 반수 이상이 그렇다고 답변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성희롱에 대한 의료진의 인식이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결국, 그동안 미디어에서 재현되어 온 모습보다는 의료진들의 인식이 환자들의 인식과 가까운 편이기에 이를 좁힐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에 기초하여 김 연구원은 진료 객체로서의 환자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서 환자를 보는 인식론적 전환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뒤이어 김 연구원은 의료진, 의료기관, 의료진단체, 보건복지부, 교육기관 차원의 규제 방안으로 진료과정 성희롱 예방교육, 의료기관 시설기준 정비, 의료기관 이용자에 대한 정보 제공, 의료기관의 성희롱 피해구제 절차 마련, 지역별 단체의 조사 및 징계 방안 마련, 진료과정 제3자 동석 고지(샤프롱 동석 제도), 성희롱 행위자 면허 규제, 진료과정 성희롱 예방 가이드라인 마련 등을 제시하였다. 끝으로, 진료과정 성희롱 예방기준(안)에 대한 유형별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발제를 마무리하였다.

  발제 후 이어진 토론을 크게 세 가지 내용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실태조사에서 사용된 용어 및 향후 연구에 대한 제안, 앞으로의 성희롱 규제 현황 및 개선 방향, 그리고 가장 논쟁이 되었던 진료상 편의와 필요 사이에서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실태조사에서 사용된 용어 및 향후 지향점에 대한 제언


  김엘림 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는 ‘성희롱’ 개념을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일으키는 경우로만 한정하면 소위 보복형 성희롱과 조건형 성희롱이 누락될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즉, 실태조사 보고서에도 등장하듯, 성적 언동을 거부하는 이유로 진료상의 불이익을 준다든지, 성적 희롱을 조건으로 진료상의 혜택을 주는 경우 모두 진료상의 성희롱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를 종합하여 진료기관 성희롱의 개념을 조건형, 보복형, 환경형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성적 함의’라는 용어의 명확성 문제를 제기하였다. 보고서에서는 성적 함의를 성적 의도와 같은 개념으로 쓰고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성희롱의 성립 여부에 있어 성적 의도의 여부는 관련이 없다고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결정한 바 있고, 성적 의도는 성희롱의 성립요건이 되지 않는다고 최근 대법원에서도 명시한 바 있기 때문에 표현에 대한 오해의 소지를 없애줄 것을 주문하였다. 


  김엘림 교수는 또한 향후 연구범위의 확장을 제안하였다. 우선, 환자가 의료진을 성희롱하는 경우도 고려할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환자가 여성 의료진에 대해 인권침해를 할 수 있는 소지도 있기 때문에 성희롱 예방지침을 만들 때는 의료진이 이용자에게 하는 성희롱뿐만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한 고려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불어, 성희롱을 한 주체로서 남성 의료진의 경우와 여성 의료진의 경우의 차이점에 대한 분석이 없다며, 앞으로 성별 분석의 필요성 또한 제기하였다.


진료과정의 성희롱 규제 현황과 개선 방향에 관하여


  다음으로 이번 실태조사에서 미비한 것으로 지적된 진료과정 성희롱에 대한 규제 현황과 관련하여, 이영일 보건복지부 의료자원정책과 사무관은 의료인 품위 손상 행위에 대한 자격정지는 때에 따라 3개월까지 가능하고, 이러한 행위가 상습적, 지속적, 반복적, 의도적으로 있었다면 면허정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감의 차혜령 변호사는 의료기관이나 의료인단체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상황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의료법상의 품위손상을 원인으로 한 자격 규제 관련 규정에서 진료과정의 성희롱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고 피력했다. 또 의료기관이나 의료진이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제시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최재욱 대한의사협회 상근부회장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에 동의하며 성희롱 규제와 관련한 내부적인 임시 안을 만들어 중앙윤리위원회에서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진료과정의 성희롱과 관련한 사전 정보 및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였다. 김엘림 교수는 성희롱 예방 교육과 더불어 성희롱이 발생했을 경우에 진료기관 이용자, 의료진, 종사자가 어떤 곳에서 성희롱에 대한 고충을 얘기하고 처리할 수 있을지와 관련한 안내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윤 연구원은 의료기관 이용자들이 성희롱으로 인식하는 상황들에 대해 의료진들이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는 차이를 되짚으며, 성희롱 예방은 단순히 발생률을 낮추는 것을 넘어, 무관용(Zero Tolerance)을 지향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피력하였다. 이에 대해 앞서 환자 자신의 노력 또한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다수 참가자는 불균형한 지식 관계와 정보의 비대칭성을 고려할 때 환자보다 우선하여 의료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주희 대한한의사협회 이사는 진료의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놓칠 수 있는 부분에 대해 공감하고, 협회 차원의 보수교육이나 윤리교육의 필요성을 받아들여 학부교육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필수 과목으로 넣어서 환자에 대한 배려를 포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이번 발표에서 제기된 ‘진료상 필요성이 성적 함의를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최근 예방교육에서 알렸다고 밝혔다. 이 부분은 다음의 논점과도 연결된다.


진료상 필요인가, 진료상 편의인가 – “환자는 진료와 성희롱 방지 모두 포기할 수 없다” 
 

  토론에서 가장 쟁점이 된 부분은 앞서 공감의 김정혜 연구원이 제기한 “진료상 편의인가 필요인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재욱 부회장은 의사 입장에서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응급 상황 등을 고려할 때, 성희롱을 방지하는 것보다는 진료를 제대로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에 대해 이상윤 연구원은 다수의 의사에게 진료과정의 성희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심리적 거부반응이 강한데, 결국 문제를 푸는 첫 단추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임을 이야기했다. 


  공감의 차혜령 변호사는 최재욱 부회장이 제기한 치료냐, 성희롱 방지냐의 양자택일적 질문이 지니는 함정을 지적하였다. 무엇보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를 포기할 수가 없다. 진료의 과정에서 성희롱이나 성희롱으로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환자와 의료진 간의 신뢰가 깨지게 되고, 이에 대한 대처로 환자는 그 병원을 다시 찾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에서 보듯 이 둘은 결국 닿아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료과정의 성희롱이 의료진이 생각하는 것보다 광범위하게 발생한다는 문제 인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공감의 김정혜 객원연구원은 논란이 되는 ‘편의’의 표현과 관련하여, 특정 의료 행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혹은 다른 방식으로 대체 가능한 것인가의 구분 기준으로 썼음을 밝혔다. 예를 들어, ‘진찰법’ 교과서에서 정확한 폐 진찰을 위해 속옷을 포함한 상의를 모두 벗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과연 대체 불가능한 유일한 방법인가 고민하는 데서 지금의 문제를 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료적으로 필요하다고 일컬어지는 진료 행위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기존의 방식이 정당하고 충분한지 의심하고, 나아가 진료상 목적도 달성하면서 성적 침해도 일으키지 않는 다른 방법은 있지 않을지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백미순 소장 역시 의료인들이 ‘의료기관 이용자들의 의료 지식이 충분하다면, 이런 진료행위를 성희롱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와 같은 방식으로 섣불리 예단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하며, 의료진의 기존 진료 개념에서 환자나 의료시설 이용자의 생각을 수용해야 할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결국, 진료 시 사물을 보듯 대하라는 기존의 의학 교육에서 나타나는 단순한 객체로서의 환자의 지위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서의 환자의 지위로 전환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환자’ 또는 ‘의료기관 이용자’, 단순한 진료 객체가 아닌 인격적 존재로 
 

  사실 이와 같은 근본적인 인식 전환의 필요성은 토론 후 방청객 질의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소개하지 못했지만, 의료기관 이용자들이 가장 많이 성희롱으로 인식한 공개된 장소에서 옷을 갈아입게 하는 것과 관련한 논의에서 일부 토론자는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비용의 문제를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이처럼 의료기관 이용자의 인격에 대한 이야기보다 처리해야 할 비용만으로 환원되는 논의 속에 한 참가자는 실제 성희롱 피해자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들의 얼굴에 성희롱의 예방 및 방지가 아니라 비용의 잣대를 들이밀 수 있는지를 되물었다.


  이번 진료과정의 성희롱 예방기준 마련을 위한 실태조사는 의료진의 진료행위에 대한 불신이나 폄하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만 응급환자와 만성질환을 가진 사람, 동네의원과 대학병원, 내과와 산부인과, 한의원과 치과병원 등 다양한 상황 속에서 진료의 전반적인 과정에서 성희롱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함을 이번 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진료 시 성희롱 문제를 마주하고, 예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 알려진 성희롱의 사례들 속에서, 만약 의료진들의 행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절차가 있었더라면, 아니 더 중요하게는 자신의 말과 행동이 의료기관 이용자에게 성적 침해를 가할 수 있다는 의료진의 인식이 있었다면, 그 풍경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사가 배를 여기저기 만지고, 주물럭거리는 거지 뭐야!”라는 한 친구의 생소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생겼던 왠지 모를 불쾌감이 어디에서 연유했는지도 조금은 알 수 있게 된 것 같다.
 

  진료상 필요성을 입증해야 한다거나, 자질을 의심받는 등 의료진의 부담 및 두려움도 일견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막연한 우려와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예방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이번 실태조사는 더욱 의미 있지 않나 싶다. 이와 같은 원활한 의사소통과 적극적 참여 속에 비로소 성공적인 진료가 가능해지고, 의료진과 의료기관 이용자의 만족도 모두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눈치를 챘을지 모르겠으나, 이 글에서는 되도록 환자가 아닌, 의료기관 이용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신에게 병원을 찾는 이는 그저 아프고 돈을 낼 뿐인 ‘환자’인가, ‘의료기관 이용자’인가. 이 물음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일방향의 질병 치료를 넘어,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는 의료로 나아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글_ 권준희(19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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