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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애인권

탄원서 – 33년의 강제입원, 국가의 책임을 묻습니다

사건 설명: 실종된 지 33년 만에 가족을 찾은 홍은영(가명)님. 국가가 신원조회, 연고자 찾기를 게을리 해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정신병원에 있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과 관할 지자체인 부산 해운대구를 상대로 1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하였고, 1심에서 2000만원을 지급하라는 일부 승소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과 부산 해운대구는 불복하여 항소를 제기하였고, 원고 측도 일부 패소에 대하여 부대항소, 항소심이 진행 중입니다. 이 탄원서는 항소심 재판부에 제출하는 탄원서입니다.

관련 글 33년 만에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여성 국가배상청구소송 1심 승소

 

저는 올해 마흔네 살의 조현병 당사자 박목우라고 합니다. 홍은영(가명)님이 처한 안타까운 사건을 접하고 무슨 말이든 도움이 되는 말을 해 드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저는 스무 살과 서른 살, 두 번에 걸쳐 발병했습니다. 서른 살, 저는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쳐 십 년이 넘게 여러 증상으로 고통받으며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고립되어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아가던 저의 삶은 마흔두 살을 전후하여 바뀌게 되는데 그 중심에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절실하게 들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는 증상도 확연히 좋아졌을 뿐 아니라 이렇게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부족한 노력을 기울여 탄원서를 쓰기 위해 마음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탄원서는 저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사람의 온기’에 대한 저의 보답이자 누군가의 곁에 ‘사람’으로 서고 싶은 저의 간절한 바람을 그러모아 쓰여졌습니다.

여기 말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때는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고 언니와 함께 즐겁게 재잘대며 돌아오던 노을빛 저녁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후의 삶은 그녀에게서 말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녀가 무엇을 겪었는지, 왜 말이 없어진 것인지 우리는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습니다. 다만 추측할 뿐입니다. 그녀가 거쳐 온 삶을 통해서 말입니다.

직업을 찾으러 서울로 간다던 그녀가 세상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타전한 곳은 광주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31년이 흐른 뒤 다시 돌아온 그녀는 영양이 부실해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말이 사라졌으며 표정이 없어졌습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시설에 수용되어 있었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시설은 특이한 ‘치외법권’지역입니다. 그곳에서는 사회의 법이 아닌 시설 관리자의 법이 우선합니다. 당사자의 목소리와 요구는 소위 ‘전문적인’시설 관리자의 권력 앞에 무기력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인간으로 셈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원받을 수 있는 보조금의 형태로 셈해집니다. 시설 안에서의 인권유린과 부패라는 실상은 ‘섬김’, ‘소망’, ‘사랑’ 등을 내세우고 있는 시설의 위선과 맞물려 가려지곤 했지만 이제 세상은 다 알고 있습니다. 시설은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국가는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였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복지를 위탁한 시설은 이제 시설기업이 되어 어떠한 법적인 처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형태를 바꾸는 식으로 자신의 부를 늘려갑니다. 홍은영씨가 있었던 햇빛 요양원이 있었던 부산 지역에서는 시설비리 사건이 수없이 터져 나왔고 집단 폭행 사건과 여성 수용자에 대한 성폭행 사건, 국가보조금 횡령 사건이 있었던 햇빛 요양원도 정신병원으로 모습을 바꾸어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과연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이미 드러난 다른 시설비리 현장을 통해서도 그 비극을 생생하게 전해 듣고 있습니다.

인종이나 이념 등을 이유로 대량 학살을 하는 것을 제노사이드라고 합니다. 시설은 한 인간의 일상에 대한 제노사이드입니다. 복지라는 허울을 걸치고 있지만 그것이 야기하는 일상의 폭력과 비인간적인 위계구조는 사회적 손상으로 이어지고 결국 시설 밖의 삶을 살아낼 힘을 빼앗아 갑니다. 갇힌 공간 안에서 어떠한 인간적인 권리주장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야만적인 시스템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삶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것으로 밖에 살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곳에 홍은영씨는 31년을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공무원들은 단지 지문을 채취하고 몇 가지의 질문을 하는 것으로 홍은영씨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삶을 절멸시키는 시설의 현장에 대해 무지하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공무원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었던 최선이란 과연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요. 그것이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으려면 그녀가 처해 있던 삶의 현장에 대한 문제의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홍은영씨가 감금된 삶으로부터 회복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어야 하지 않을까요. 홍은영씨는 낯선 이 앞에서는 입을 잘 열지 않지만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공간에서는 몇 마디의 말이나마 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진심어린 관심과 적극적인 경청이 있었다면 31년의 세월을 요양원이나 정신병원에 감금되어 보내지 않아도 되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렇지 않고 ‘나는 할 일을 했다’는 위안은 어떤 부정의에 눈 감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면피용 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부언하자면 2016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이러한 차가운 관료제에 의해 사람들의 삶이 파괴되어 가는지를 증언한 영화입니다.

그녀가 시설에 감금되어 있던 시간들, 그 시간동안 부패와 폭력의 도가니를 묵인해 온 국가. 그래서 우리는 홍은영씨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문채취의 정밀해진 기술이 홍은영씨를 신원불상자에서 구해내었다는 서사와는 결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이때 국가의 범죄는 “범죄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권리와 특권을 완전히 박탈할 수 있는” 권력의 행사 구조 자체이기에 더욱 심각한 것입니다. 국가는 말합니다. 이 판결이 ‘신원불상자’의 집단소송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판결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신원불상자의 ‘권리’를 되찾게 해 주는 최초의 판결이 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굴곡진 역사였습니다. 그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희생당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과거사 정리’를 국정과제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선감학원’이나 ‘형제복지원’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묻는 것은 비참한 국민들을 만들어 낸 역사를 이제라도 바로잡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신원불상자들은 어쩌면 우리의 야만적이었던 현대사가 만들어낸 비극, 그 자체일지 모릅니다. 고문이나 사형만이 국가범죄인 것이 아니라 단지 생존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희망도 욕망도 가지지 못하는 목숨만 붙어 있는 생명을 양산해내는 국가의 구조도 범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을 넘어 그 인간의 영혼까지를 절멸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사 청산은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그들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정당한 보상을 하는 것이 자신이 원치 않는 폭력으로 인해 삶이 망가져버린 한 인간에 대해 국가가 행할 수 있는 최선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국가의 책임을 명시하는 것은 분명 새로운 역사 쓰기의 한 줄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입니다. 시설 비리에 눈감으며 유착되어 있던 국가, 그리고 비참함에 빠진 삶에 대해 행정 업무라는 요식행위로 밖에 행동할 수 없었던 우리 국가의 무능력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그 모두에 대해 포괄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국가입니다.

국가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한 나라가 정당하고 올바른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국민들의 행복을 최선을 다해 보장하고 있는지, 그들에게 제대로 된 몫을 분배하고 있는지, 이 모두가 국가라는 하나의 상징체계 안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2020년의 대한민국, 저는 그 대한민국의 얼굴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이 시대 국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자신이 방기했던 국민들에 대한 진정어린 책임감으로 자신이 양산했던 비극적인 삶들에 대해 정중한 존엄을 인정하는 국가가 될 것인지, 예산을 문제로 언제까지나 비참한 삶들을 비참한 대로 놓아두고 책임을 면피하는 식으로 스스로의 존립근거를 위태롭게 하는 국가가 될 것인지를 말입니다.

인도출신의 경제학자이자 아시아계로서는 처음으로 1998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은 “경제적 발전이란 풍요로움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실질적 자유가 확장되는 것”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2020년의 한국의 국가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자신의 책임을 넓힘으로써 자유의 영역을 넓혀가느냐, 자신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정의에 눈 감느냐는 선택 말입니다.

그리고 저의 개인적인 소견은 2020년의 대한민국은 분명 자유의 영역을 넓히는데 자신의 소중한 권력을 사용하리라는 확신입니다.

 

글쓴이 _ 박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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