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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와 난민

[이주와 난민] 사할린 한인 국적확인관련 출장




 


1.



지난 5월 24일부터 4박 5일 일정으로 사할린에 다녀왔습니다.



사할린은 섬입니다. 사할린은 러시아 연해주 동쪽, 일본 북해도 북쪽에 위치한 러시아의 땅입니다. 1910년~1918년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토지를 잃은 조선의 농민들이 살 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정착한 땅이며, 1938년의 ‘국가총동원령’에 의하여 강제징용된 조선의 한인들이 벌목장, 탄광 등에서 강제노역을 한 땅이기도 합니다.


 


 


2.



1992년 김지미 주연의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는, 그 제목만으로도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는 세 개의 이름, 세 개의 국적을 강요받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1945년 패전국 일본은 사할린에 억류된 일본인의 귀환에 매우 빠르고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반면에 일본 국적이었던 조선인들의 한국 귀환은 철저히 통제된 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본 패망 후, 한국으로 가는 배가 올 것이라는 소식에 수만명의 한인들이 코르사코프 항구에 모여들었지만, 그들의 희망은 끝내 이루어지 않습니다.


 


당시 소련은 전후처리에 의하여 남사할린의 영토귀속이 변경되었을 때, 국제관행인 영토변경에 의한 국적선택제도를 실시한 것이 아니라 소련 국적법을 일방적으로 적용하여, 거주 한인들을 일괄적으로 무국적자로 처리합니다. 1950년대 이후 소련은 사할린 한인에게 북한국적을 취득할 것을 권장하고, 동시에 소련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당시 사할린 한인의 귀환을 거부했던 일본 정부의 논리는 다음의 3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할린 한인들이 모두 일본에 의해 강제동원된 것은 아니므로 자유 모집에 응하여 자의로 이주한 사람과 강제동원된 사람 구별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강제동원된 경우라 하더라도 일본 정부는 귀환의 법적 의무까지 부여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1946년 집단 송환시 일본은 연합국의 지배 아래 있었고, 집단송환은 미·소간의 협정으로 실시된 것이며, 귀환 승선자의 선별은 소련 당국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으므로 일본 정부가 한인의 귀환 기회를 봉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할린 한인의 억류는 전후 처리 과정에서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배경으로 하는 국제관계와 일제의 조선인 기민(棄民)정책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명자, 아끼꼬, 쏘냐>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는 러시아 인형, 마트로시카를 닮아 있습니다. 인형 속에 작은 인형이, 그 작은 인형 속에 더 작은 인형이 들어있는 러시아 목각 인형 마트로시카는 웃는 듯 우는 듯 표정을 읽기 어렵습니다. “운명의 선물 마트로시카, 열고 또 열어도 나오는 건 슬픔뿐”이라는 노래는 겹겹의 무표정으로 역사를 견뎌내야 했던 민중들을 위한 것이었을 겁니다.


 


‘쏘냐’라는 이름으로 사할린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는 ‘아끼꼬’가 ‘명자’가 있습니다. 그 겹의 정체성은 역사가 강요한 상처였고, 아직 어느 역사, 어느 국가도 그 상처와 슬픔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3.


이번 출장의 목적은 그 역사의 문제가 여전히 오늘의 문제임을 확인하고, 문제를 현재화하는 방식을 고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뜻을 모아 소송 등의 방식으로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려고 합니다. 고민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 문제제기가 ‘핏줄’에 방점을 찍는 민족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 오늘의 문제제기가 목각 인형의 허리를 비틀어 과거의 정체성을 끄집어내고 강요하는 방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부에서 추진한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사업과 같은 방식은, 오늘 또 다시 삶의 선택을 강요하며, 과거 역사의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삶의 현장과 구체성을 존중하면서도, 역사의 문제의식을 담아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줄 믿습니다. 러시아에서 보고 느꼈던 것은 ‘민족’이 아니라, ‘국가라는 제도에 의해 버려진 삶’이었고, ‘역사가 비틀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과 삶에 충실한 제도를 통해 과거의 상처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여전히 오늘의 과제입니다.


 


글_정정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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