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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법 교육·중개

[월례포럼] 아시아아시아 ‘버마의 인권상황에 대하여’

시작하면서

    “미얀마 : 정식명칭은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이다. 서쪽은 인도양에 면하며, 북동쪽은 중국, 동쪽은 타이, 라오스, 북서쪽은 인도에 접한다. 독립 후 민주주의를 도입했으나 1962년 쿠데타로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1990년 총선에서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국민연맹(NLD)이 압승하였으나 군사정부에 의해 무효화된 뒤 현재까지 군부독재가 계속되고 있다. 2006년 수도를 양곤(Yangon)에서 밀림지대인 핀마나(Pyinmana)로 옮기고 이름을 나이피다우(Naypyidaw)로 바꿨다. 행정구역은 7개 구획(taing)과 7개주(pyi ne)로 이루어져 있다.”

    월례포럼 “아시아 아시아 – ‘버마’의 인권상황에 대하여”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왜 미얀마가 아닌 ‘버마’라고 했을까였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던 1989년 뉴스에서 ‘버마’가 미얀마로 국호를 바꾸었다는 걸 본 기억이 나는데 왜 아직도 ‘버마’라고 했을까? 게다가 인터넷에서 ‘버마’라고 검색을 해도 언제나 나오는 결과는 ‘미얀마’에 대한 것 뿐이었다. 결국 나는 이상희 변호사님의 영상 상영이 끝나자 마자 질문을 던졌다.

아시아 아시아 – 버마 vs 미얀마

    “그건 단순히 말장난일 뿐입니다. 1989년 군사정권은 버마족만이 아닌 소수민족까지 모두 다 포용하는 의미로 미얀마로 국호를 바꾸었다고 하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죠. 오히려 그러한 군사정권의 행태에 저항하는 의미로 최근의 활동가들은 버마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겁니다.” 왜 공감 변호사님들은 그리고 활동가들은 ‘미얀마’가 아닌 ‘버마’라고 부르는 지 궁금했던 나는 이상희 변호사님의 설명이 매우 명쾌했다. 미얀마는 군사정권이 내세운 하나의 허울일 뿐, 결국 버마에 존재하는 것은 버마 족을 위한 ‘버마’일 뿐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월례포럼의 제목에서 아시아를 두 번 강조한 것은 아시아의 허상과 현실을 대비해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 아니었을까? ‘미얀마’로 잘 포장되어 있는 곪아가는 ‘버마’.. 이 글을 작성하는 동안에도 피畸?2007의 자동 맞춤법 완성기는 ‘버마’라는 단어를 입력하자마자 ‘미얀마’로 변환해 내기 바빴다. 처참한 현실을 덮어두고 보기 좋은 허울로 미화하기에 바쁜 아시아의 모습처럼 말이다.

아시아 아시아 – 기득권의 아시아 vs 민중의 아시아

    ‘버마’는 1962년 이래로 군사정권의 독재 하에 있다. 영상 첫 머리에서 보여준 ‘버마’의 일반적인 모습은 군부에 대한 찬양 일색이다. 랑군 시내 부대 안에 버젓이 세워진 국내 대기업의 대형 간판이 보여주듯이 군사정권의 비호 하에 다국적기업들은 ‘버마’의 엄청난 자원(가스)을 착취하고 있었다.

    ‘버마’ 군사정권은 소수민족의 존재를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한 위협 요소로 보고 ‘버마 민족화 정책’을 펴며 군사력으로 그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탄압하고 사회, 정치, 경제적 이익을 박탈하고 있다. 이러한 군사정권의 일관된 ‘군사화’ 정책은 전체 인구의 30%이상을 이루는 소수 민족을 극도로 탄압하고 있으며, 결국 많은 소수 민족들은 ‘버마’ 접경지역인 태국의 매솟 캠프 등으로 쫓겨 나고 있었다.

    영상에 나온 매솟 캠프의 인터뷰에선 군사정권과 결탁한 채 소수 민족들을 강제노동으로 내몰고 군사정권의 인권침해를 묵인 아니, 버젓이 용인하고 있는 한국의 대기업과 공기업에 대한 활동가들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었다. 공기업까지도 ‘버마’ 군사정권의 인권침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니.. 이건 우리 정부가 버마의 인권침해를 버젓이 묵인하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버마’의 상황은 우리의 그것과 많이 닮아 있었다. 영국이 버마를 식민지로 지배하면서 다수의 버마 민족을 지배하기 위하여 소수 민족을 이용하는 분할통치 정책을 폈고, 잠시 버마를 지배한 일본은 버마 민족을 이용하여 소수민족을 탄압하였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제국주의 세력이건 혹은 지금의 군사정권이건 그들은 자신들의 힘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소수민족’이라는 버마의 특수한 상황을 이용한 것이고, 우리 역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을 이용하여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해 온 것이다.

    기득권들의 아시아와 민중의 아시아… 기득권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조작된 동의’들은 끊임없이 민중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있었다. 버마의 군사독재자들의 눈에는 ‘민중’은 없었다. 우리의 군사정권들이 그러했듯이…


아시아 아시아 – 발전된 아시아 vs 행복할 수 없는 아시아

    “물론 다국적 기업의 인권침해와 강제노동이 나쁘지만, 다국적 기업이 쥐어주는 그러한 최소한의 돈이 없었다면 그들은 인신매매, 아동 성매매의 현장으로 내몰렸을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딜레마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인턴들의 궁금증은 결국 이러한 딜레마로 모아지게 되었다.

    지정토론을 맡으신 황필규 변호사님께서는 “주민이 소유한 온전한 담배 한 가치를 가져가면서 재떨이의 꽁초를 주워준다면 만족할 수 있겠는가”라는 아라칸 족 난민의 이야기를 인용하시면서 “만약 여러분이라면 얼마에 여러분 가족의 강제노동에 동의할 수 있겠습니까?” 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고, 이상희 변호사님께서도 “경제가 발전하면 행복할 것이라는 명제가 과연 옳은 이야기인지 강자 논리에 익숙해진 우리의 관점을 바꾸어 보아야 할 때”라고 말씀하셨다.

    군사정권의 독재 하에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어 낸 우리지만,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를 자문할 때인 것 같다. 모든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해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인간의 존엄성이 해쳐졌고, 그렇게 이루어진 경제발전의 결과로 인간은 소외되어 갔으며, 돈은 전지전능한 신이 되어버렸다. 이혼과 가출로 빚어진 가정의 파괴, 높아져가는 자살률, 극심한 양극화…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지금 우리는 행복한가?

    발전해 가는 아시아의 겉모습은 우리의 행복을 그 담보로 잡았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에서 묘사한 라다크의 모습처럼, 풍족하지 않아도 아무도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우리의 행복은 경제적인 풍요를 보장하겠다는 거짓말에 사라져 버렸다. 끝없이 화려해 보이는 발전된 아시아, 그리고 그 안에 웃음을 잃어가는, 절대 행복할 수 없는 민중들의 아시아.. 그것이 아시아의 현실이자, ‘버마’의 현실이고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마치며 – 아이들은 죄가 없다

    영상에 나온 멜라 캠프(난민캠프)나 고향을 등지고 변방으로 쫓겨난 사람들의 레퍼허, 매써리 마을(피난민 마을)은 유난히 아이들이 많았고 그들을 가르치는 학교의 모습이 영상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 언제 또 그 곳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다 자라고 나서도 번듯한 직업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당장 오늘이라도 버마군의 폭격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 맑은 눈망울을 가진 아이들은 아무 죄가 없다. 어른들의 기득권과 돈이 그들의 맑고 깨끗함을 가져가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냉엄하다. 그래서 더 무섭고, 두렵고 안타깝다.

    ‘아시아’라는 단어가 완벽한 인간성을 회복한 행복의 이름이 되길, 허울뿐인 ‘미얀마’가 진정한 ‘미얀마’로 거듭나길, 그리고 그 아이들의 맑은 눈을 지켜주시길..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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