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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법 교육·중개

[월례포럼] 성희롱, 왜 문제인가?




 
법과 사회가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성’이라는 분야는 흥미롭기도 하지만 헷갈리는 문제입니다. 법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는 경우 흔히 우리는 사회적 문제와 법적 문제를 혼동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회사 직원이나 같은 학교 친구가 성적인 요구를 한 경우,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는 ‘희롱당한 것’ 같지만, 법 테두리 안에서는 특정 조건이 만족하지 않는 이상 (‘권력관계’를 포함) 성희롱으로 인정받기는 어렵습니다. 홍성수 교수님의 강연을 듣기 전까지 저 역시 성희롱과 성추행을 혼동하고, 사회적으로 부적절한 언행 및 행동과 법적 성희롱을 혼동했었는데,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이 궁금해하는 ‘성희롱’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명쾌하게 풀어주신 홍성수 교수님의 강연은 인상적이고 유익했습니다.
 
 
성희롱 문제가 어려운 이유, 특히 법적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이유는 성희롱을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선, 남녀차도 클뿐더러 개인차도 크다고 합니다. 한 사람한테는 불쾌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한테는 오히려 칭찬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또한, 각 경우의 상황과 맥락, 사회상에도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여성에게 술을 따르라고 하는 것을 ‘성희롱’이라고 봐야 할까요, ‘사회적 관습’이라고 봐야 할까요? 둘 다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동아리장이 회원에게 성적인 요구를 하는 것을 ‘권력관계’ 아래 행해지는 성희롱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이 경우 역시 그렇게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달라짐에 따라 우리의 인식이 달라지는 경우로 홍성수 교수님께서 좋은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과거 ‘여검사, 여교수’라는 표현도 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곤 했지만, 현재 여성이 더는 특징적이지도 않고 수적 차이도 없는 업무 환경에서는 직종 앞에 ‘여’ 자를 붙이는 것이 ‘검은 옷 입은 학생’과 같은 묘사적인 표현과 다르지 않을 수 있고, 그저 편의적 호칭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생긴 것이 그 예입니다.
 
 
더불어, 불이익을 판단하기도 모호합니다. 고용 조건형 불이익(해고된 경우)은 비교적 쉬운 문제이지만, 환경형 불이익의 경우, 예를 들어, 남자가 대다수인 회사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농담을 해서 소수 여성 직원이 소외되고 그런 환경에 반기를 들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홍성수 교수님을 따르면 일반적으로 성희롱으로 인정되겠지만, 증명해 보이는 데까지는 상당한 어려움이 수반될 것입니다.
 
 
이런 문제점에 관해 홍성수 교수님은 성희롱은 어떤 조직인지, 어떤 환경이었는지, 본인의 감정 등 기준이 필요한데, 기준이 명확할수록 맥락은 약해지고, 맥락이 약해지면 전체가 일그러져 결국은 악순환의 고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어려운 점을 이유로 홍성수 교수님께서는 성희롱 문제를 법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시하셨습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페미니스트 맥키넌, 버틀러, 코넬의 이론을 설명해주시며, 특히 버틀러와 코넬이 주장했듯, 여성이 희생자로 묘사되거나 성적 후견 주의, 즉, 국가가 부모처럼 여성을 돌봐주지 않으면 여성 스스로는 문제 해결 능력이 부족하다는 인식이 굳어질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하셨습니다.
 
 

더불어 외국 사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미국과 유럽 사례를 비교했을 때, 미국은 법 중심적이고, 노조 힘이 강한 유럽은 노조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법 규제 강도가 우리나라와는 비하지 못할 정도로 상당히 센 미국도 성희롱 관련 법률이 생겨난 이후, 소송 건수가 줄지 않은 것을 보면, 법의 유용성이 정말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홍성수 교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신 국내 소송 사례를 들으니 법적 대처의 문제점이 좀 더 쉽게 보였습니다. 교장, 교수, 남자 교사 셋, 여자 교사 셋이 있는 자리에서 교감이 여자 교사를 가리키며 교장 선생님께 술을 따르라고 한 경우, 성희롱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쟁점이었는데, 여자 교사 중 한 명은 성희롱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한 명은 성희롱까진 아니었다고 주장했고, 교감은 사회적 관습으로서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여교사를 지칭한 건 그들만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1심, 2심을 거쳐 대법원까지 5년이라는 긴 기간을 끌고 결국 교감의 승소로 마무리됐습니다. 비록 이기긴 했지만, 여기서 진정 교감이 승리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를 한 건 아닐까요? 홍성수 교수님은 왜 이런 사건이 대법원까지 갔어야 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렇다면 대책은 무엇인가. 시민 사회 상담소와 같은 관문을 설립하는 것입니다. 물론 관문을 설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제대로 된 시스템이 구축되어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위의 사례에서도 여자 교사는 전교조에 1차 지원 요청을 했지만, 전교조에서 교감과 학교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였고, 우리나라의 국가인권위원회 역시 권고만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 위의 사례에서도 성희롱이라는 판단을 내렸지만, 정작 판결에서는 별로 유용하게 작용하지 못했습니다. 관문이 필요한 이유는 위에서도 언급했듯 법으로 대응하려면 맥락, 개인의 감정 등 주관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가게 되는데, 특히 미국과 같은 판례 중심이 아닌 우리나라 법 체계에서 수많은 성희롱 건수를 일일이 주관적 요소를 고려하여 판단하려고 한다면, 법적 대응이 시간과 자원만 낭비한 채, 일관적이지도 못하고 피해받은 사람을 제대로 구제하지도 못하는 결과를 가지고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성희롱 문제에서 중요한 고려 점은 ‘성희롱 피해를 당한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가?’인데, 홍성수 교수님은 대다수 피해자는 ‘행위의 중단’을 원한다고 언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소모적인 법적인 절차를 밟기 이전에 그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재 50명 이상의 사업장에서 반드시 실시해야 하는 1년 1회 성희롱 교육과 같은 주입식 교육 방법이 아닌, 진정으로 직장이나 학교 구성원들이 성희롱이 어떤 점이 문제이고, 왜 문제이고, 어떻게 함께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 인식을 바꾸는 것이 더 근본적인 해결책일 것입니다. 자체 규율을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이 밖에 상황극을 해보는 것도 실제 미국 듀퐁사에서 성공을 거두었던 성희롱 문제 예방책입니다. 이렇게 인식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을 때야 비로소 설사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행위의 중단을 유도하거나 요구할 수 있고, 문제 상담을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성희롱, 성폭행 등을 다룬 성 관련 법으로만 봤을 때는 다른 국가에 비해서도 ‘인권 선진국’이라고 볼만큼 우수하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법이 제대로 적용되고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란 기대는 이제 조금 내려놓고,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대안을 찾아야 할 시점인지도 모릅니다.

 

 

_ 글 조윤현(공감 17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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