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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 공익법 교육·중개

[월례포럼] 성전환자의 인권, 특별법 실태와 대법원지침

공감인턴 월례포럼_2006. 10. 30.
성전환자인권연대 “지렁이” 대표 한무지님

성전환자특별법 실태 및 최근의 대법원지침 등 성전환자의 인권

작성 : 4기 인턴 이  선  희 

월요일 저녁 6시 공감 사무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씨익 웃으면서 들어오는 한무지님. 작은 체구와 동그란 얼굴의 그는 흡사 80년대 명랑만화의 ‘똘이’를 연상케 했다. 약간은 굵은 목소리에 다양한 손짓과 표정으로 성전환자에 대한 역경과 어려움을 쭈욱쭈욱 뽑아내었다. 차갑고 가혹한 세상에서 받은 폭력을 ‘경험담’으로 승화하여 재미있게 전달한 한무지씨의 입담을 글로 살릴 생각을 하니 어깨가 무거워진다. 최대한 정확하게 동시에 재미있게 옮기기 위해 약간의 각색과 2그람의 과장이 불가피했다.

“지렁이요? 왜, 사람들이 지렁이 생각하면 바로 꿈틀꿈틀하고 땅 밑에서 몸 비비다가 비가 오면 꾸물꾸물 기어나오는 뭔가 징그러운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지렁이는 땅을 비옥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생물체에요. 무엇보다 자웅동체구여. 하하하.” -단체 이름이 ‘지렁이’냐는 질문에 답하는 한무지님.

성전환자?
한무지님은 어제 ‘지렁이’ 발족 연설문을 만들다 책상에 엎어져 자서 늦었다며 사과를 했다. 포럼을 위한 인쇄물이나 강연내용을 달리 준비하지 않았으니, 성전환자에 대해서 아는 바를 들어보고 거기에 맞춰 강연 내용을 채우기로 했다. 황성현님(공감인턴4기)이 성전환자는  G.I.D(Gender Identity Disorder), 즉 정신적 성과 육체적 성이 불일치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외관적인 성적 요건을 갖추기 위한 수술을 모두 마친 사람을 trans sexual로 다시 구분한다. 한무지씨에 의하면 진보적인 진영에서는 ‘성전환자’를 매우 넓게 해석해서 성 자체의 구분을 거부하는 사람 모두를 지칭하기도 한단다. 성전환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규명된 것은 없다. 더군다나 성전환증이 후천적이냐 선천적이냐 혹은 장애냐 기호냐의 논쟁도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성전환자에 대한 대우나 처리방식이 많이 혼란스러운 것 같다. 한무지씨는 성전환증을 장애로 보는 시각은 매우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성전환증이 ‘참을 수 있는’ 가벼운 문제는 아니라고 말한다. 태아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부적절한 약을 먹고서 호르몬 부작용으로 태아의 뇌하수체에 영향을 끼쳐서 생긴 성전환증이 있다. 그 경우 아이는 유년기부터 육체와 정신의 성이 불일치해서 고통을 받는다. 

그들의 어린시절
한무지씨의 친구들을 보면, 유년시절 FTM(여자->남자)친구들은 어렸을 때 로봇을 가까이 하거나 MTF(남->여)친구들은 인형하고 친했다고 한다. 특히 한무지씨의 경우도 유년시절 ‘건담 운동화’의 매력에 푸욱 빠져 엄마한테 호되게 혼나면서까지 ‘건담 운동화’를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교에서 서서히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는 교육을 하잖아요. 남자는 머리를 짧게 깎고, 여자는 머리를 기르는 등. 저도 머리를 삭발하고 와서 엄마한테 먼지 나게 맞은 적도 있어요. 흐흐”
사춘기시절에 2차 성징을 겪고 신체적 변화가 두드러지면서 성전환자들의 정신적 고통은 더 심해진다. 이 시기에 대부분의 성전환자는 생식기관을 감추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신체 혐오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한무지씨는 가슴을 보기가 싫어서 항상 불을 끄고 샤워를 했다고 한다.
“제 친구 중에는 정말 기막힌 비유로 신체를 표현한 녀석이 있어요. 그 녀석 어머니께서 진짜 바퀴벌레를 싫어하거든요. 자신의 가슴을 볼 때마다 그 녀석은 바퀴벌레를 가득가득 담은 주머니 두개를 줄에 매달아서 목에 걸고 있는 것 같대요. 그 정도로 자신의 가슴이 꼴 보기 싫다는 거죠.”
더 극단적인 경우로는 군대에서 자신의 성기를 자른 MTF 성전환자도 있었다. 앞의 사례들은 신체혐오증의 극단적인 예들이다. 한무지씨에 따르면, 대부분의 성전환자는 신체혐오증을 성장기에 경험한다고 한다.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 – 주민등록증과 취업
소주 한잔 마시려고 해도 주민등록증을 보여야만 하는 사회다. 내가 아무리 마음은 남자로 살아도 어디를 가든 주민등록증을 보여주는 사회에서 취직도 하고 병원도 가고 술집도 가려면 주민등록증을 피할 수 없다. 한무지씨는 3년간 근무했던 회사에서 자신의 뒷번호 ‘2’가 발각된 순간 쫓겨났다. 그렇다면 주민등록증 뒷번호를 꼭 1~2번으로만 시작해야 하나. 3번 4번으로 만들어서 성전환자용 뒷번호를 제공하는 건 어떤가. 그러나 3번 4번은 자신이 성전환자임을 온 세상에 알리는 이름표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남들과 다른 ‘외계인’ 딱지가 아니다. 남들처럼 살 수 있게, 묻혀 지낼 수 있는 평범한 이름표가 필요하다.
‘신분’을 제시하는 상황을 피하다보니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는 일들에만 지원하게 된다. 성전환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에서도 신분확인이 필요 없는 어둠의 업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주로 대리운전, 성업종, 배달 등의 일이다. 요즘에는 대리운전에도 신분증을 요구해서 직업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비정규직에 저임금, 최악의 근로조건에서 일하더라도 안전하게 일을 하면 좋을텐데. 문제는 사고가 났을 경우 치료비를 한 푼도 못 받는다는 것! 처음부터 신분을 속이고 일을 구한 것이고, 결국 손해배상 한 푼도 받을 수 없는 불법취업이 되어 되레 쫓겨난다. 한무지씨는 배달을 하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어떻게든 신분증을 제시하는 상황을 피하려고 혼자 뒷수습을 하려 했으나 사고의 피해가 커서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신분을 속이고 취업을 했으므로 보험료의 혜택은 받을 수 없었고 자신의 피 같은 돈 몇백 만원으로 치료해야 했다.  성전환자들은 이미 법의 사각지대에 있으므로 사고가 났을 때 보상과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처지다. 오히려 경찰서가 모욕을 주거나 병원이 진료를 거부하는 등의 차별을 겪고 있다. 그 외에도 한무지씨가 그의 정체를 아는 낯선 사람들에게서 받은 폭력은 그 형태와 내용이 아주 각양각색이다. 그 중에 하나. 어떻게 알았는지 한무지씨 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띠리리링.”
  “네~”
  “(바로 욕 들어간다.) 야 이 XXX야. 여자가 왜 그 모양이냐. 너 같은 XX 때문에 나라가    이 모양이지~~ 주저리주저리 미주알 고주알”
이런 욕설을 듣고서 한무지씨는 화가 났지만 그에게 말을 걸었다고 한다.
“당신! 도대체 뭐가 문제야? 뭐가 무서워서 그래?”라고 시작된 대화는 결국 한무지씨가 수화기 끝의 남자를 설득하고 위로하면서 끝났다고 한다.
“다음부터는 그러지마. 잘 살아.”
그 자리에 있던 인턴들은 쿡쿡 웃고 있었다. 자신을 짜증나고 힘들게 하는 스토커와 대화를 하고, 또 그 경험을 농담으로 승화시키는 한무지씨의 명량함이 요즘말로 참 ‘간지’났다. 한무지씨는 농담과 우울 사이를 능숙하게 줄타기 하는 곡예사다.

수술
대법원에서 내려온 성전환자 호적정적을 위한 사무처리지침에 보면, 성전환을 허용하는 요건 중에 하나가 성전환 수술이다. 호적 정정 신청을 위한 첫 번째 준비단계는 신뢰할 수 있는 정신과 의사로부터 진단서 떼어오기. 그러나 정신과에서 떼 온 이 ‘진단서’라는 것이 부르면 값이 되는 형식적 종이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은 자기 자신, 주위 친구들, 혹은 가족처럼 자신의 생활과 밀접한 사람들이 더 잘 알텐데, 생면부지의 의사에게서 받은 진단서로 자신의 성을 증명하는 게 웃기다고 한무지씨는 말한다. 더군다나 이 진단서는 병원에 따라, 의사에 따라 값의 차이가 천양지차라고 한다. 가뜩이나 취직도 안되는데 자꾸 돈 들어가는 일만 생긴다. 두번째 단계는 호르몬 치료. 호르몬 치료는 주로 비뇨기과에서 받는다. 비용이 만만치 않아서 비정규직에 저임금으로 가난 속에 몸담은 성전환자들은 약국에서 호르몬제를 직접 구입하여 스스로 팔에 주사를 꽂는다. 집에서 투입하는 호르몬제의 부작용은 결국 본인이 책임져야 하는데, 그 책임의 대가가 혹독하다. 한무지씨의 한 친구는 호르몬 한번 잘못 맞았다가 간과 심장의 기능이 정지될 뻔 했다(여자 되기 전에 죽는다니 억울하다). 또또 한 친구는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또또또 한 친구는 피부질환으로 얼굴이 처참하게 상했다. 돈 없어서 병원 못 가는 것도 억울한데 뒷감당하기 버거운 부작용 때문에 몸뚱이가 망가지고 있다.
이제 호적 정정을 위한 여정의 끝에 다다르고 있다. 외관을 갖추기 위한 대수술! 이 조항을 성전환자들은 독소조항으로 지정한다. 의학계도 성전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혹은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신체에 일어나는 변화를 우려하여 성전환 수술의 필요성을 인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호르몬제 맞을 돈도 없어서 스스로 투여하는 마당에 천만원에서 억대를 넘나드는 외관수술 비용을 어떻게 마련하란 말이며, 안전성이 검증도 안된 수술의 뒷감당은 누가 한다는 말인가(의료사고 보험으로 처리해 주던가)? ‘에피소드’라고 하기에는 살벌한 수술과 관련된 ‘사고사’를 들어보자.
한무지씨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의료기술로는 성전환 수술은 많이 부실하다. 게다가 의료보험의 대상이 아니고 대부분의 성전환자는 신분증이 없기 때문에 의료사고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성전환 수술의 안정적인 의료체계를 인정받는 태국조차도 의료사고가 생겼을 경우 해외이기 때문에 A/S는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무지씨의 한 친구. 그는 대전 어느 한 병원에서 성전환 수술을 싸게 해준다는 소식을 듣고(거의 반값에) 대전으로 달려갔다(그 병원이 친구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다). 수술은 우려대로 ‘대실패’였다. 부분마취를 해서 환자는 또랑또랑한데 여기를 찌를까 저기를 찌를까 칼을 잡은 의사를 보며 그 친구는 자신이 마루타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사는 학교를 거꾸로 다녔는지 절개한 부분을 꿰매지도 않고 친구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절개한 부분이 뜯어져서 피는 콸콸 쏟아지는데 조금만 늦었더라면 피가 부족해서 죽을 수도 있었다(떳떳하게 남자로 살기 전에 죽는다니 말이 되는가!). 병원 측에 항의를 했더니 ‘불쌍해서 수술한 의사님에게 감사해야지 무슨 뻔뻔한 짓이냐’며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오는 상황을 연출한다. 영화 Reality bites처럼 현실은 언제나 쓴 법.
‘신체적 외관을 갖출 것’이라는 조항. 이렇게 위험하고 비싼 수술을 꼭 해야 하나? 수술의 비용과 위험성은 차치하더라도 수술의 효과는 어찌할 것인가? FTM의 경우 외관 성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성기의 생식기능은 없으니 장식물 수준이다. 하긴 생식 능력이 없는 것 또한 호적정정의 요건이니 수술로 얻은 성기는 생식할 때 발기해서야 쓰겠는가! 그렇다면 외관상 성기는 순전히 ‘정상’ 남자라는 요건을 채우기 위한 겉치레일 뿐이다.
여기서 한무지씨는 질문한다.
“꼭 성기가 있어야 남자인가요?”
이 세상에는 자궁에 혹이 생겨서 자궁을 떼어낸 여자도 있다. 성기는 있지만 성적 능력이 없는 남자도 있다. 외관의 구비조건이 성전환의 필요조건인지 고민해 보자. 게다가 성기를 붙이는 과정은 잔혹한 엽기 행각을 취미로 삼는 오타구라야 즐길 수 있는 수술이다. 우선 왼쪽 팔목, 다음은 오른쪽 팔목의 순서로 살을 떼어서 성기를 만든다. 수술이 미완일 경우에는 최후의 수단으로 살 한점 안붙어 있는 발목의 살을 떼어내야 한다. 생살을 떼어내는 고통에 더해서 뼈가 잡히는 발목에서 살을 떼어낸다고 상상해보자. 아! 입을 다물 수가 없다.

자신의 성을 자신이 결정할 권리
드디어 시간은 굽이굽이 고개를 넘어 한시간을 넘어서고 있었다. 내 머리에 계속 맴도는 질문. ‘그냥 살면 안 되나?’. 또 하나 ‘꼭 여자와 남자를 구분해야 하나?’ 이 질문의 극단에는 황무지 위에 당당히 바람을 맞으며 세상을 초월한 어느 무정부주의자가 서 있었다. 각설하고. 수술의 비용과 위험을 고려해서 수술 없이 ‘남자’로서 살아가면 안 될까? 그러나 너무 이상적인 질문이다. 한무지씨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한 소시민으로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아프면 병원에 가고, 친구들과 술 한잔 걸치는 소소한 일상을 즐길 권리가 있고, 그러길 원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정한 틀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면 에베레스트 산보다 높은 장애물을 연신 넘어야 한다. 주민등록제가 폐지되지 않고, 성정체성을 사회가 지정하는 세상에서 발 딛는 이상, 한무지씨도 1로 시작하는 뒷번호가 필요하다. 그도 먹고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한무지씨는 결혼까지 약속한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의 부모님께도 모두 인사를 드린 상태였다. 하지만 처남 될 사람에게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바람에 그는 그녀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는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려 토실토실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한무지씨를 ‘삼촌’이라고 부른단다. 한무지씨는 토실한 그 아기를 볼 때마다 발음하기 참으로 쉬운 두자, ‘아빠’ 소리가 그렇게도 듣고 싶단다. 2007년 NEW 러브스토리라고 할 만하다. 인권억압 때문에 헤어질 수밖에 없는 두 남녀의 슬픈 이야기. 충무로는 이런 것을 왜 영화로 만들지 않고 자고 있는가?
성전환자를 만나기 전에는 솔직히 ‘이상한’ 혹은 ‘신기한’ 사람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은 나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살고 싶은 소박한 꿈을 꾸는 ‘보통사람’이었다. 오히려 가슴에 피가 고였던 수술의 아픔을 싱글싱글 웃으며 풀어놓는 한무지씨야말로 뼛속까지 명랑한 그 성격을 본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2주 전에 정변호사님이 ‘성전환자 호적정정에 대한 사무처리 지침’을 읽어보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딱딱한 사무처리 지침을 읽으면서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 마음으로 느낄 수는 없었다. ‘인권’이란 단어로 성전환자 개개인의 고통을 느끼기에는 나의 내공이 많이 부족하다. 10월 포럼에 만난 한무지씨 덕분에 나는 성전환자의 ‘인권’의 세밀한 무늬를 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인권’을 위해 세상을 바꾸는 움직임은 보기에는 멋지지만 정작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타인의 ‘고통’을 나의 상처처럼 아파할 수 없고, 소수자가 처한 현실을 내가 겪어볼 수 없다. 그래서 항상 ‘인권’은 흐릿하고 빈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감에서의 이런 활동들 덕분에 고통의 세세한 무늬와 또 다른 현실을 또렷이 볼 수 있는 것 같다. 다음 달 월례포럼은 어떤 분이 어떤 무늬를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한무지씨의 행복을 빌며 이만 총총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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