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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주와 난민

선별적인 HIV 검사 요구에 대한 A씨의 투쟁 – 10년의 도전 끝에 마침내 법원에서 배상 판결을 받다

  2019년 10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뉴질랜드 국적 A씨가 제기한 국가배상소송에서, 인종에 기초하여 선별적으로 이루어지는 HIV 검사는 위법이므로 국가는 A씨가 청구한 금액 전액인 3,000여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9. 10. 29. 선고 2018가단5125207 판결) 이 글에서는 결코 ‘권리 위에 잠자지 않았던’ A씨의 10년에 걸친 투쟁과정과 판결의 의의를 소개합니다. 

  뉴질랜드 국적의 A씨는 2008년 E-2(회화)비자로 한국에 입국하여, 한 초등학교에 원어민 영어보조교사로 취업하였습니다. 1년의 근무가 끝난 뒤 당연히 재계약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던 중, 그는 교육청으로부터 ‘HIV 검사가 포함된 건강검진서’를 제출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동료 한국인 교사를 비롯해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직원 중 누구도 그러한 검사를 요구받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외국인 교사 중에서도 ‘한국계 외국인 교사’는 검사 요구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부당한 요구라는 생각에 그는 HIV 검사 요구를 거부하였고, 교육청은 그에게 계약 갱신 거부 통지를 하였습니다. 이전까지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던 관행을 거부한 그 순간, 그의 싸움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진정신청을 하고, 계약 내용에 따라 중재절차를 밟았습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는 그의 신청을 각하하였고 중재재판소는 교육청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해당 지침·관행이 유효하게 존속하는 이상 한국에서 판단을 받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유엔의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인종차별철폐위원회)’에 ‘개인진정(혹은 개인통보)’을 제출하였습니다.[각주:1] 결국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2015. 5. 1. (해당 정책이) “공중보건에 실효성이 없고, 근본적인 인권 향유를 침해하고 차별적”이므로 이를 폐지하고 A씨가 입은 실질적 정신적 피해에 대해 배상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각주:2]

 

  유엔의 이 같은 권고는 인종차별적인 제도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였고, 결국 2017. 7. 3. E-2 비자 외국인 등록 시 요구되던 HIV 검사제도는 폐지되었습니다.[각주:3][각주:4] 부당한 요구를 받은 뒤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해온 A씨의 노력이 인종차별적 제도의 폐지라는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A씨에게는 어떠한 배상도 없었습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의 권고를 국내에서 이행할 방안을 고민하기 위해 대리인단이 꾸려졌습니다. A씨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꼼꼼히 훑어 본 뒤 든 생각은 단 하나였습니다. ‘와, 정말 열심히 싸워왔구나’

 

  대리인단은 법원에 국가배상소송을 제기하기로 결정하였고, 1년 가까이 지속된 소송과정 내내 그리고 판결문을 손에 쥐는 그 순간까지도 대리인단을 불안하게 했던 것은 ‘소멸시효’였습니다. 그가 국내·국외의 가능한 절차를 모두 동원하여 권리투쟁을 하는 동안, 부당한 요구가 발생한 때로부터 무려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버렸기 때문입니다.

 

  대리인단은 당시 A씨에게 HIV 검사를 요청한 교육청의 행위는 국내법 및 각종 국제인권조약 위반에 해당하며, 사건 직후부터 지금까지 본인의 권리 구제를 위해 노력해 온 A씨의 청구권의 소멸시효는 만료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법원은, 당시 국내법상 HIV 검진 대상자에 해당하지 않는 A씨에게 HIV 검사 결과 제출을 요구하고 이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재계약을 하지 않는 국가의 행위는 “감염인 또는 감염인으로 오해받아 불이익을 입을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한 보호의무를 저버린, 위법성이 농후한 행위로서 사회질서에 위반되는 행위”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법원은 권리구제를 위한 A씨의 투쟁과정을 시간순서로 하나하나 나열하며, “최소한 원고(A씨)가 결코 권리 위에 잠자고 있지 않았음은 분명”하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결국 법원은,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권고를 공개한 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A씨가 국가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보아 A씨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하며, 국가에게 A씨의 청구금액 3,000만원을 지급할 것을 선고하였습니다.[각주:5]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적 제도에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고 체류기간이 만료되어 출국한 뒤에도 지치지 않고 투쟁하여 한국의 부당한 제도를 폐지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정작 본인의 피해에 대해 정당한 배상을 받지 못하였던 그의 사연을 알고 있습니다. 이번 판결을 통해 ‘끝까지 싸우면, 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는 A씨의 메시지가, 부당한 제도와의 길고 긴 투쟁에 지친 누군가에게 가서 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글 _ 김지림 변호사

 

 

  1.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철폐에 관한 국제협약(1979. 1. 4. 발효 조약 제667호)은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아 국내에서 발효된 국제조약입니다. ‘개인통보제도’란 국제인권조약의 이행을 담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의 하나로서 당사국의 관할권 안에 있는 개인이 당사국에 의하여 자신의 규약상의 권리를 침해당한 경우 해당규약위원회에 그 사실을 통보하고, 이를 통보받은 해당규약위원회가 그 사건을 심사하여 관련 당사국 및 통보자에게 그 견해를 통보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본문으로]
  2. 인종차별철폐위원회 제86차 견해, 관련기사: 2015. 5. 20. 연합뉴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 “韓 외인강사 에이즈검사제 없애야”https://www.yna.co.kr/view/AKR20150520190700088 [본문으로]
  3.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가 이와 같은 결정을 한 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사회권)위원회,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위원회 역시 대한민국에 인종에 기초한 선별적 HIV 검사 제도를 폐지할 것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본문으로]
  4. 관련기사: 2017. 7. 8. 연합뉴스, ‘차별논란’ 외국인 강사 에이즈 검사 폐지…유엔권고 수용 https://www.yna.co.kr/view/AKR20170708033800004 [본문으로]
  5. 과거 법원은 과거에 발생한 반인권적이고 위법한 국가행위에 대한 청구권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결정이나 관련 제도에 대한 법원의 판결과 같은 국가기관의 결정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기산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번 판결은 유엔의 인종차별철폐위원회라는 국제조약기구의 결정 역시 국가의 위법행위에 대한 청구권의 소멸시효 기산점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한 것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김지림

# 국제인권센터# 성소수자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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