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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익법 교육·중개

공감 월례포럼 장애여성 자립생활 이야기





장애여성 스스로, 그리고 다르게 살다



고등학교 때 봉사활동 동아리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나는 시험기간을 제외한 매주 주말이면 근처 양로원이나 장애인 복지시설 등을 찾아가 봉사활동을 하고는 했다. 언젠가 여성지적장애인분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일을 보조하고 있을 때였다. 용변을 보는 행위는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다. 가장 기본적이기에 스스로 처리하지 못하면 바보취급을 받기도 하고,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이기에 다른 사람의 시선 하에 극도의 수치스러움을 느낀다.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자신이 용변을 보는 행위를 누군가 곁에서 지켜보고 도와준다는 생각을, 그럴 때 어떠한 느낌이 들것인지 상상할 수 있을 뿐 알지 못한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지적장애와 신체장애를 모두 갖고 계신 아주머니께서 용변 보는 일을 돕는 것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신다’는 전제로 이루어지는, 정말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휴지로 아주머니를 닦아드리고 손을 씻겨드리는 동안 아주머니께서 계속 어눌한 말투로 어떤 말씀을 내게 하셨다. ‘겅부 열..심히…해’


그렇게 아주머니께서 용변 보는 것을 도와드린 일은 오랫동안 아주머니의 ‘공부 열심히 해’라는 여운 있는 말씀으로 남아있었고,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사회적 약자를 돕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더 굳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유년시절 동안 내가 쌓아온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념은 어디까지나 ‘나 자신의 기준으로’ 시설에서의 여러 봉사활동 경험 및 기타 매체를 통한 간접경험을 통해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진솔한 의견을 들어볼 기회가 한 번도 없었기에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지 못했고, 그들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난 결코 사회적 약자가 되는 일이 없고 항상 도와주는 처지일 것이라는 무의식중의 강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난 사회적, 경제적 약자의 아픔을 타자화한 채로 그들을 돕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 같다.


타자화를 자기화로 바꿔나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었다. 11월 <빈곤의 얼굴들>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던 공감 월례포럼에서 안창영 감독님을 모시고 감독님이 제작하신 영상을 함께 시청한 적이 있다. 철거민, 장애인,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의 아픔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그 영상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장면은, 시설에서 벗어나 자립생활을 꿈꾸는 한 장애인의 이야기였다. 항상 ‘너는 장애인이니까 하면 안 돼’라는 말을 듣고 살았고, 그 누구도 자신에게 ‘너는 장애인이어도 해도 돼’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고. 평생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의 고충을 이제까지의 수많은 시설 봉사활동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 우리는 장애인을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시설에서만 살아가도록 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을까. 장애인권을 전문으로 하시는 염형국 변호사님의 팀에 있으면서 장애인들의 자립생활 운동에 대한 조사를 많이 해왔지만, 장애인이 자신의 목소리로 하는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었다.




때마침 장애여성공감독립생활센터 [숨]의 조미경 소장님을 모시고 진행한 이번 12월 월례포럼은 장애인의 독립생활 운동 전반뿐 아니라 장애여성의 독립생활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볼 소중한 기회였다. 몇 달 전 자택에서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화재로 숨진 故 김주영 씨가 생전에 장애인 이동권을 다룬 다큐멘터리 <외출 혹은 탈출>을 함께 시청한 뒤에, 소장님께서 ‘독립’을 화두로 우리에게 물음을 던지셨다. ‘여러분에게 독립은 어떤 의미인가요?’


‘경제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 ‘주체적인 삶’ 등을 의미한다는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지만, ‘독립’은 어떤 구속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일상에서 자주 사용하지 않는 용어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독립’에 대해 제대로 고민해본 적 없는 동안, 장애인들은 독립을 위해 짓궂은 날씨나 거동의 불편함에도 마다치 않고 거리로 나서서 시위하고 있다. 그들이 요구하는 독립은 나에게, 당신에게, 우리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게 주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독립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들이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으며 일상생활을 하는 것을 두고 ‘독립적이지 못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다양한 형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농업인이 없다면 우리는 밥을 먹지 못할 것이고, 버스 운전기사가 없다면 아침 출퇴근이 어려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독립적이지 못한가? ‘독립’에 대해 고민하면서 우리가 그 반대의 의미로 대치시켰던 ‘의존’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편, 세계보건기구와 세계은행이 ‘2010년 세계장애보고서’에서 발표한 장애인 인구는 전 세계 인구의 15%, 약 10억 명 정도이다. 그러나 내가 이제껏 다녔던 학교의 친구 중에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었던가. 학교 친구로, 직장 동료로, 동네 이웃 주민으로 나와 일상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애인은 대개 교육, 노동에서 비장애인과 철저히 격리된다. 장애인들이 우리와 같은 공간이 아닌, 특수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시설에서 살며 시설에서 마련해준 단순노동프로그램에 종사하게 된 차별의 원인은 무엇일까. 이동, 노동, 교육 등 일상에서의 배제는 장애가 운명이고 팔자이며, 오로지 개인의 탓이라는 시각에서 비롯된다. 개인이 가진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장애를 문제로 만드는 ‘비장애 중심의 사회 환경’이 문제라고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또한, 소장님께서는 장애인 독립생활운동을 장애여성의 관점에서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셨다. 성별 이분법적인 남성중심의 한국사회에서 장애/여성은 유독 ‘의존적이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통제 및 보호가 필요하다’는 편견의 대상이 되기 쉽다. 장애를 가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범죄의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장애여성의 선택과 결정이 존중되는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장애여성에 대한 관점 전환뿐 아니라, 장애인 독립생활운동을 전개할 때도 젠더의 요소를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IL(Independent Living) movement는 우리말로 대개 ‘자립생활 운동’이라고 번역되어 사용되고 있다. 나 역시 업무의 하나로 장애인들의 자립생활 운동 관련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독립’이라는 말보다는 ‘자립’이라는 단어가 더 익숙했다. 그러나 장애여성이 동등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장애여성공감에서 ‘자립’이라는 단어 대신 ‘독립’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후자가 좀 더 주체적인 삶을 위한 운동에 걸맞기 때문일 것이다. ‘독립’은 단순한 물리적 의미를 넘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결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고, 운동하고, 일하는 시설에서 벗어나 스스로 삶을 계획하고 일구어나가는 그러한 삶. 물론 ‘당신은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라는 물음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답할 사람은 비장애인 중에서도 드물 것이다. ‘주체적인 삶’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문제로 계속해서 담론을 형성해나가야 한다. ‘장애’ 안에서도 서로 다를 수 있는 다양한 정체성이 존중되고, 그에 따른 다양한 독립의 이야기들이 활발히 진행될 때, 장애인들이 소망하는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글_ 백나라(16기 자원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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